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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Nov 25. 2024

약속

일주일이 시작되는 날이다. 매일 같은 날임에도 날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 년의 시작, 일주일의 시작, 새로운 한 해 첫날의 시작, 한 해의 마지막 날 등등.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다지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연, 금주, 아침 일찍 기상하기, 매일 운동하기 등등 다양한 약속을 자신과 한 후 지키거나 어긴다. 지킨 후에는 더 발전된 약속을 만들고, 어긴 후에는 다시 새로운 약속을 만든다. 자신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타인과의 약속도 중요하다. 약속은 존중의 의미다.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고 지켜나가고, 타인과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특히 타인과의 약속은 얼마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느냐에 따라 그 약속을 지키거나 또는 쉽게 어기기도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물론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해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도 있다. 또는 다른 중요한 일이 발생하거나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약속이 갑자기 만들어질 때 적당한 이유를 대며 약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신뢰를 잃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상대방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거둬들인다. 따라서 약속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고, 일단 만든 약속은 가능하면 지켜야 한다.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자신을 아끼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 역시 그런 사람을 우습게 보거나 가볍게 여긴다. 나는 과연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 예전에는 쉽게 약속하고 쉽게 어기는 편이었다. 뭐 한 가지 제대로 진득하니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시작한 후 언제든 마음이 변하면 쉽게 포기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의 약속은 비교적 잘 지키는 편이었지만, 자신과의 약속은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었다. 발전이 없는 매우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못 미친 사람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늘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불만과 무의미한 공상만 하며 지내온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부족했기에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살아왔다. 겉으로는 밝은 척하기도 했고,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난 척을 하기도 했다. 타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며 성작 필요한 내실을 다지지는 못하며 살아왔다.      


참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삶의 대부분을 나를 옥죄고 있는 업보와의 싸움을 하느라 낭비하며 살아왔다. 업보는 과거의 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는 전생만 과거가 아니다. 일초 전도 과거고,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미래 역시 다음 생이  미래가 아니다. 이 글의 첫대목을 쓸 때, 지금 이 글은 미래였다. 하지만 미래였던 그 시점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현재는 잡을 수 없다. 흘러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나 미래 역시 잡을 수 없다. 현재가 찰나에 머물다가 미래로 흘러가고, 그 미래는 과거가 되어 버린다. 이미 흘러간 물에 발을 다시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흘러가는 물로 발을 씻으며 깨끗한 발로 미래를 맞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에 묶여 있거나, 미래에 대한 공상만 한다면 우리 발을 씻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늘 과거의 업으로 인한 더러운 발로 현재의 물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며 미래를 맞이한다. 업보의 무한 반복이다. 하지만 이 이치를 안다면 무한 반복인 업보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깨끗한 발로 땅을 디디며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다.      


안거를 한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머물며 자신의 과거 업장을 소멸하는 방편이다. 이미 만들어진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에 상응하는 업보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라진다. 과거의 때가 물에 불어서 수면으로 떠오를 때 명상의 주제에 집중하며 그때를 흘려보내는 작업이 발을 씻는 과정이다. 그때를 붙잡고 시비를 따지거나 과거의 감정이나 상황에 빠진다면 현재라는 시간은 사라지고, 이는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수행의 주제가 무엇이든 다만 떠오르는 과거의 때를 다시 자신에게 묻히지 않고 흘려보내기만 하면 된다.    

  

경행을 하는데 별다른 감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두고 경행을 한다. 턱 아래 부분이 당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느낌을 확인하고 다시 경행을 이어간다. 조금 후에 그 느낌은 사라진다. 그 느낌은 누가 만들었을까? 굳이 이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고 잠시 머물면 된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느껴지면 느껴지는 대로. 단순히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감각은 몸을 지니고 있기에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정신작용은 그 감각을 알아차릴 뿐이다. 이것이 전부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백문백담>에 부처님께서 “갈 때는 ‘간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관찰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매우 쉽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쓸데없는 알음알이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게 무슨 수행인데? 그걸 누가 못해? 그게 수행이야? 등등 쓸데없는 망상만 부리며 이 쉬운 방법을 어렵게 만들며 스스로 자신의 발을 더럽히고 있다. 과거의 모든 업장이 현재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데 역시 손가락에서 팽창감이 느껴진다. 팽창감에 명칭을 붙인 후 다시 배를 관찰한다. 해파랑길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떠오른다. 생각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다시 배를 관찰한다. 30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아침 수행을 마친 후 근력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한다. 신문을 읽고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오전 일과를 마친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과거의 때를 현재의 흐르는 물에 씻고 새로운 발로 나의 길을 걷는다. 그 새로운 발걸음은 또 과거가 되고 다시 현재의 물로 발을 씻은 후 새로운 발걸음을 한다. 무한 반복이다. 하지만 과거로 인한 때 묻는 무한반복이 아닌 매 순간 깨끗한 발로 걷는 무한반복이다. 약속은 나를 변화시킨다. 오늘 하루도 충만하다 그리고 이미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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