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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코드: 보라

by 걷고

밤에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재미는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한강 대교에서 바라본 다리 위의 수많은 차들과 강변대로와 올림픽대로의 교통 체증을 보며 속으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나쁜 마음이 있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건강하게 걷고 있는 자신이 뿌듯해서 느껴지는 희열감이다. 고된 하루 업무를 마치고 꽉 막힌 도로 위 차 안에서 다시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퇴근 시간에 자유롭게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차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정상적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인다.


‘드레스 코드: 보라’에 맞춰 각자 멋을 내고 만났다. 멋진 가방, 바지 위의 무늬, 양말, 팔찌, 스카프, 티셔츠, 우산, 심지어 과자 봉지까지 각자 보라색을 맞추기 위한 번거로움을 기꺼이 즐겼다. 어떤 분은 혹시나 준비 못 하신 분들을 위해 팔찌를 열개나 준비해서 나눠주셨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예쁜 팔찌를 나눠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분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길 안내자는 ‘보라 꽃’을 선물했다. 베푼 사람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꽃이고, 꽃을 선물한 사람의 마음 역시 너무 아름다웠다.


다 큰 어른들이 보라색 하나로 어린아이가 되었다. 만나자마자 서로 준비해 온 보라색 준비물에 연신 감탄과 웃음을 보내며 즐거워했다. 기획 의도도 좋았지만, 그 의도에 맞춰 덩달아 춤추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한쪽에서 북을 치면, 다른 쪽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간다. 걷기 모임이지만, 이런 색다른 요소가 가미되어 흥을 돋게 만든다. 그런 흥이 있기에 한강 대교 세 개를 하룻밤에 건너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눠주신 팔찌를 하나씩 팔에 차고 팔을 내밀어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 나이, 경력, 신분, 성별 모든 것을 떠나 보라색 팔찌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이다.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보라색 팔찌를 찬 사람과 차지 않은 사람으로. ‘자발적 드레스 코드’가 ‘자발적 조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조직과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아온 나였지만, 이런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가끔은 이런 설렘과 즐거움이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보라’를 보는 시각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것이 ‘참 보라’이고, 어떤 것이 ‘덜 참 보라’인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보라’만이 ‘보라’이고 다른 사람들의 ‘보라’는 ‘보라’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상대방은 그 반대로 얘기할 수 있다. 심지어는 ‘노랑’을 ‘보라’라고 우길 수도 있다. 그냥 인정해도 별 무리가 없다.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태도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결코 공정하지 못하다. 사람에 대한 어떤 평가도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실은 이미 주관 속에 갇힌 객관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특히나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다. 그러기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그 인연에 소중함을 느끼며 감사해야 한다. 물론 서로 맞지 않아 만남이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서로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과 그간의 인연에 감사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이 줄어들고,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특히나 여럿이 모인 장소에서는 더욱 그렇다. 굳이 남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나 스스로 점검하고 말로 짓는 구업(口業)을 경계할 뿐이다.


단순한 기획 ‘드레스 코드: 보라’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다리는 강으로 인해 격리된 지역과 격리된 사람을 연결해 준다. ‘걷기’는 자신의 경험과 분리된 자신을 이어주고는 아름다운 다리다. 이 삼박자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걷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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