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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자락길 저녁 걷기

by 걷고

낮이 길어졌습니다. 지난주에도 걸었던 안산 자락길을 이번 주에도 걸었습니다. 지난주 안산에서 바라 본 시내의 야경은 마치 영롱한 보석이 빛을 찬란하게 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선명한 진분홍의 노을은 어둠 속에서도 강한 여운을 하늘에 남기고 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들어가는 데크길 중간의 가로등은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한 주 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오늘 걸은 길은 지난주와 같은 길인데도 낮에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낮과 저녁의 중간인 밝음 속에서 길을 걸었습니다. 안산 자락길의 차분한 데크길과 짙은 녹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지난주와 같은 곳에서 바라본 시내의 야경은 어둠이 다가오기 전 밝음으로 인해 영롱함이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 모습대로 아름다웠습니다. 노을 역시 약간 어두운 하늘 속에 짙은 여운을 남겨 놓았습니다. 자락길을 걷는 내내 짙은 어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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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진한 아카시향과 숲 내음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데크길 위에 떨어진 아카시 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밀려 양 옆으로 몰려있었습니다. 꽃잎이 마치 우리의 걸음을 축하하기 위해 양 옆으로 도열한 느낌이었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우리의 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낮에 이 길을 걸으면 꽃들이 발목을 잡습니다. 덕분에 사진도 찍고 꽃구경도 하고 냄새도 맡고 주변을 여유롭게 구경하기도 합니다. 밤에는 야경, 노을, 하늘에 떠있는 초승달이 자꾸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오히려 그런 멈춤이 고맙습니다. 그 멈춤이 하루를 마무리 하는 시간에 마음 속 여유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안산 자락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숲 속 무대에서 잠시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 속에 묻혀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은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끊임없는 생각들이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듭니다. 생각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감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종소리는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그 순간만이라도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생각과 감각, 둘 중 오직 하나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종소리를 듣는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들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올라오는 생각을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종소리에 집중하면 생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비록 1,2분에 불과한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데크길로 이루어진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지나 안산 방죽으로 내려가는 길은 불규칙한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안산 방죽은 마치 신선들의 안식처 같은 느낌이 드는 연못입니다. 맨 처음 안산 방죽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분위기에 취해서 숨죽이며 조용히 머물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죽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자 그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방죽의 주변에 조성된 데크길에 올라서니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위험 신호를 감지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합창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만의 축제를 위해 빨리 벗어나서 조명이 만들어 낸 꽃길을 걸었습니다.


마치 나무로 만들어진 길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약 3주 전 처음 그 꽃길을 걸을 때는 꽃을 밟고 걷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오늘은 너무나 태연하게 꽃을 무시하듯 밟고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그 꽃들은 제게 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꽃길을 다른 마음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길과 풍경은 같은데 제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밟기 조심스럽고 볼 때마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익숙한 것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자님은 제자 중 안회를 가장 아끼셨는데, 그 이유가 가까울수록 더욱 예의를 지키는 모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익숙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셨던 안회가 떠올라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물레방아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돌다리를 지나 홍제천 길을 걸었습니다. 홍제천을 지나 홍제역으로 가는 길에 장미 터널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걸을 때에는 오늘처럼 장미가 만개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터널이지만 꽃들이 만개한 터널은 완전히 다른 터널이었습니다. 그 터널이 너무 환상적이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자연은 순응하며 변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걷기를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연의 모습이 변하고, 참석하는 사람들도 변하고, 저의 마음도 변하고 있습니다. 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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