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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카라 (Sankhara, 行)

by 걷고

‘담마 코리아’는 ‘고엥카 위빠사나 명상센터’의 한국 분원으로 전북 진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일반 산사와는 다르게 길가에 있고, 특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도 않다.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니 전에 고시원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1인 1실의 숙소, 공용 화장실 및 세면실, 식당, 그리고 명상실이 시설의 전부이다. 길가에 자리 잡고 있고, 일반적인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어쩌면 위빠사나 수행 자체가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행이 삶과 분리되는 순간 이미 그 수행은 ‘죽은 수행’이다.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마음만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종교를 찾고 심신 수련을 하는 이유는 ‘마음 편히 살고 싶어서’일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삶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삶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찾고, 기도를 하고, 다양한 심신 수련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인이 되어라’라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있다. 그 의미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일상의 사소한 일에 마음 휘둘리지 말고 바위처럼 굳건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사소한’이라고 굳이 쓴 이유는 아무리 중요하고 큰일이라고 해도, 이승을 벗어나면 의미가 없고, 또한 어떠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이라는 자연의 진리 앞에서는 어떤 일도 단지 ‘사소한 것’ 일뿐이다. 삶을 비관적으로 보거나 회의적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고민거리나 큰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 ‘별일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을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이 경험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 중요한 진리를 통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뭔가 일이 틀어지면 고통스러워하고, 호들갑을 떨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코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황과 전쟁하지 말고, 그냥 오늘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기만 하면 우리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나머지는 자연의 법칙, 우주의 섭리, 삼라만상의 이치, 또는 어떤 단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알아서 한다. 그 일은 우리 영역 밖의 일이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우주’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 cosmos 가 있다. 이 용어는 ‘질서 있는 시스템’으로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정, 무정 존재들은 우주의 일원으로 우주 질서의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삶 자체도 우리의 역할이고 우주 조화의 한 부분이다. 자연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에 대한 무지로 인해 고통스러워 태풍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스스로 정화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삶의 고통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한 정화작업이 될 수도 있다. 삶에 고통이 없으면 종교가 불필요할 것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신에게, 우주의 질서에, 자연의 법칙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은 이런 ‘자연의 법칙’을 체득하는 과정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담마 코리아’를 다녀온 후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씩 명상 수행을 하고 있다. 고엥카 선생님은 마지막 날 법문에서 이 점을 아주 간절하게 당부하셨다. 다행스럽게 선생님의 육성 법문 CD를 구입할 수 있어서 시간 나는 대로 듣고 있다. 명상센터에서 매일 저녁 마지막 시간에 들었던 법문 내용이다. 요즘 다시 들으니 많은 부분을 놓치고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조용히 듣는 법문은 수행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어제 들었던 법문 내용이 아주 소중한 내용이어서 글로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외부 환경과 여섯 개의 감각기관,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 만나면서 인식을 하게 된다. ‘꽃’과 ‘눈’이 만나고 ‘음악’과 ‘귀’가 만난다. 이 과정을 식(識)이라고 한다. 인식을 하게 되면 지각을 하게 된다. ‘음악’이다, ‘꽃’이다라는. 이 과정을 상(相)이라고 한다. 지각을 하면 몸에 감각이 일어난다. 이 과정을 느낌, 즉 수(受)라고 한다.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아니면 둘 다 아니거나. 느낌에 대한 반응이 일어난다. 즉 마음의 반작용인 행(行), 즉 범어로 ‘상카라’라고 한다. 즉 좋은 느낌은 유지하고 싶어 하고, 불쾌한 느낌은 버리고 싶어 한다. 이 과정에서 바로 고통이 시작된다. 몸을 갖고 있기에 인식, 지각, 감각은 환경을 만나 반응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이 과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상카라’가 작용되면서 문제의 시작, 고통이 시작된다.

이 ‘상카라’는 이미 전에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쌓인 ‘주머니’인 무의식과 만나면서 활발하게 작용한다. ‘상카라’는 결과가 되면서, 동시에 원인이 된다. ‘꽃’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는 사람에게 꽃은 갖고 싶고 받고 싶어 하는 물건이 된다. 하지만 꽃으로 맞아 본 사람에게 꽃은 보기도 싫어하는 물건이 된다. 기존의 ‘상카라’가 튀어나와 새로운 ‘상카라’와 만나 일종의 강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만약 ‘꽃’에 대한 나쁜 감정이나 좋은 감정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면, 꽃에 대한 기존의 ‘상카라’는 힘을 잃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이 우리가 수행을 하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어떤 느낌을 느꼈을 때 빨리 알아차리고,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좋거나 싫거나 판단하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극이나 환경과 전쟁하지 말고, 반응하지 말고 몸의 감각을 바라보면 새로운 상카라는 형성되지 않고, 기존의 ‘주머니’ 속 ‘상카라’는 반응할 자양분 공급이 끊기며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그 결과 주인 노릇을 해온 가짜 주인인 ‘상카라’가 사라지게 되면서, 불성, 본성, 참 자기, 진면목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수처작주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담마 코리아’에서 수행 한 위빠사나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민감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자극들에 몸은 반응을 한다. 몸의 감각을 예민하고 민첩하게 알아차리되 반응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면, 그 자극의 힘이 줄어들고 사라지게 된다.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매 순간 자극을 만나 반응하게 되어 있다. 다만 그 자극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피하려 하거나 쾌락을 움켜쥐려 할 필요가 없다. 피하려는 마음이나 움켜쥐려는 마음이나 모두 욕심이고, 욕심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깨달은 분들은 세상사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신 것 같다. 그냥 순간을 사는 것뿐이다. 알아차리고, 판단 없이 바라보고, 반응하지 않고, 그냥 매 순간 주어진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법문의 내용을 들으며 나름대로 이해한 점을 정리해서 글을 썼지만, 부족한 공부로 인해 이 글이 위빠사나의 본질과 벗어나거나, 진리와 먼 얘기가 될 수도 있다. 이 글은 오로지 나 자신의 개인적은 느낌을 정리한 글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위빠사나 수행을 참답게 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글을 믿지 말고, ‘담마 코리아’에서 수행을 하면서 참다운 공부법을 제대로 익혀서 평화롭고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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