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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Apr 21. 2024

걷기란 내면 정화 작업이다 (안개)

걷기란?

산책자가 갖춰야 하는 적절한 마음가짐은 흔들림 없이 완벽한 수동적 자세이다. 이는 곧 어떤 느낌도 받아들이겠다는 개방적 태도다. 자비로운 자연의 위대한 힘이 이끄는 대로 나 자신을 그냥 내맡기겠다는 태도이다. (어느 인문 학자의 걷기 예찬)     


약 6년 전 걷기 동호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수더분한 인상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원만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는 마음씨 고운 사람이다. 서로 일정이 어긋나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를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만났다. 늘 뒤에서 걷는 편이어서 자연스럽게 회원들의 뒷모습을 보고 걷는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생기를 느낄 수가 없었고, 약간 넋이 나간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외아들이 심한 교통사고를 당해 어쩌면 평생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힘들게 걷고 있었던 것이다.    

 

2018년 2월 7일 교통사고로 고관절이 부러진 아들은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큰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마쳤지만, 의사 선생님도 걸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만 했다. 그녀는 그런 상황이 믿을 수가 없었고 답답하기만 했다. 수술 이후 처음 두 달간 아들은 혼자 설 수도 없었지만, 재활치료와 근육 강화 운동을 통해 8개월 만에 걸어서 나왔다. 그 당시 그녀는 아들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괴롭고 무능하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몸을 힘들게 만들고 싶어서 걷고 또 걸었다. 평상시 많이 걷지 않았던 그녀에게 1박 2일간 약 30km 이상 되는 해파랑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8년 3월에 걷기 동호회에서 해파랑길을 간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크게 힘든 일을 겪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이 만약 걷지 못하게 되더라도 평생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그전에는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하는 편이었는데,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하루에 15~20km를 1박 2일 걷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걷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부었다. 하지만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꾹 참으며 걸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아들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극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해파랑길을 걸으며 용기를 얻고 정신 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힘든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편안하게 살아왔다는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이 맡은 책임을 완수하고, 어려웠던 상황을 담담하게 견뎌내는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시부모와 친정부모 병간호를 도맡아 했다. 시부모님은 폐암과 신장암으로, 친정부모님은 당뇨와 혈압으로 돌아가셨다. 10여 년을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왔다. 가족과 집 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양가 부모님 병간호로 10년 이상의 긴 세월을 버텨온 그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도 모두 그녀 곁을 떠나버렸다. 양가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갑자기 주위가 너무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시기에 남편의 사업이 무너졌고, 그녀는 난소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을 하려고 개복했는데, 다행스럽게 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시작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예전 회사 상사 제안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겪는 과정에서 심한 갱년기 증상이 나타났다. 신랑도 싫고 자식도 싫어졌다. 혼자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집안에서만 박혀 살다 보니 어딘가 혼자 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갈 데도 없었다. 걷기 여행을 검색하다가 네이버 카페 ‘걷기 마당’을 알게 되었다. 가입 후 첫걸음 나가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버스를 대절해서 지방에 내려가 걷는 일정이 있었는데, 그때 용기 내어 참석한 후에 이 카페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갔던 회원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준 덕분이었다. 늘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는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런 모임을 몇 년 전에만 알았더라도 삶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여러 번 강조했다.     


양가 부모님 병간호로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고,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취업 후 열심히 근무하면서도 정작 그녀는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 살아왔다. 미장원도 한 곳만 다니고, 직장 생활도 한 곳에서만 하고, 집과 가족밖에 모르며 외골수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자신의 일이었다. 그녀는 불평불만을 표현하는 대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삶을 수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인복이 많아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늘 도와주고 이끌어 주기에 항상 감사하며 산다고 한다. 집안이 안정되어 가며 오랜만에 여유와 평온함을 느끼고 있을 때, 아들의 교통사고로 또 한 번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과정을 극복해 나가는 데 걷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아들과 남편의 허락을 받고 1박 2일 진행하는 해파랑 길을 매월 따라 걸었다. 길을 걸으면 잠시라도 아들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주변 경치가 오롯이 들어온다. 정신이 맑아지고 풀 한 포기도 고맙게 느껴진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걸으며 속으로 울기도 했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동료들의 격려와 말없는 기도도 많은 힘이 되었다. 포항 해변의 자갈밭을 보며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 모가 난 부분이 잘려 나가 둥근 모습으로 변한 자갈들이 마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조류로 인해 자갈들이 이리저리 쏠리고 서로 부딪치며 소리 내고 마찰로 인해 둥글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내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포항 바닷길이 가장 인상에 많이 남는다.”     


아름다운 세상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길 안내자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분들 덕분에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해파랑 길도 길안내를 해 주시는 분이 있어서 따라갈 수 있었고, 길동무들의 격려가 있어서 걸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런 봉사를 하는 분들을 보며 그녀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걷기 동호회에 참석할 때, 누군가가 옆에서 친절하게 동호회에 관한 설명을 해 주었던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마움에 대한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녀도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신경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고, 회원들 고민도 들어주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해파랑 길을 1년 넘게 매월 1박 2일 걸었던 덕분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어려운 시간을 버텨냈던 그녀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길 안내자와 길동무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페에 올라온 사진들을 정리해서 각자의 얼굴이 인쇄된 국내 유일의 개인 맞춤형 달력을 만들어 열 명의 길동무들에게 선물했다. 처음에는 혼자 카페에 올라온 사진을 선택해서 준비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길동무들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서 평생 기억에 남을 달력을 만들어 선물했다. 길을 걸으며 힘든 시간을 견뎌낸 그녀는 과연 길을 걸으며 무엇을 배웠을까?     


“지금까지 집, 회사, 식구만 알고 살아왔는데, 걸으며 시야가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해파랑길을 걷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모든 책무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걷는 것이다. 자연 경치를 즐기며,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다양한 지역 음식을 먹으며 삶이 풍부해지고 넓어진 것 같다. 또한 길을 걸으며 여유로움을 배우게 되었다. 몸은 힘들어도 생각은 편안하고 정신은 맑아지고 복잡한 생각은 사라진다. 예전에는 갈 곳도 없었고, 혼자 여행할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어딘가 함께 갈 수 있는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여유로움이 있다. 모든 세상일, 집안일을 잊어버리고 힐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걷는 것이다. 특히나 해파랑 길을 걸으며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바다 냄새도 싫었는데, 지금은 그 냄새가 좋아질 정도로 바다를 좋아하게 되었다. 바다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삶 속에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걷기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사용하는 별칭은 ‘안개’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는 집에 분재를 할 정도로 꽃을 좋아하고 다양한 꽃을 키우고 있다. 안개꽃을 좋아하기에 ‘안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걷기를 통해서 스스로 많이 변했고 성장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변화와 성장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편이 1박 2일 지방에 가서 걷는 것을 허락을 해준 것도 큰 변화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은 병상에서도 걷기 잘 다녀오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그런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들에게 좀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같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남편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고, 남편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 편이다. 가족들이 내가 걷는 것을 허락해 주고 지지해 줘서 너무 고맙다. 그에 대한 보답은 아니지만, 가족들이 싫어하는 것을 굳이 할 필요도 없고, 하지 않는 편이다. 가족들의 요구에 맞춰 생활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삶의 고통은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가져다준다. 힘든 상황을  겪어낸 그녀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졌고, 가족 간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홀로 여행 다닌다는 것을 생각조차도 못했던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 멋진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있다. 그녀의 변화에는 그녀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가족들의 지지와 격려도 큰 몫을 차지했다. 가족들은 점점 더 깊은 사랑을 느끼며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걷기와 길동무가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걷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어느새 걷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도 평일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자주 걷기 모임에 나오지는 못하지만, 매월 진행하고 있는 남파랑길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걸으며 그녀는 그 시간만이라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며 멋진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걷기란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일까?     


“걷기란 내면 정화 작업이다. 걷기를 하면 복잡한 생각을 씻어버리게 된다. 1박 2일 길을 다녀오면 그 효과가 적어도 1주일은 간다.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참석하게 된다. 지금은 가만히 누워있으면 자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길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녀는 힘든 시간을 걸으며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감사함을 느끼며 그 감사함을 가족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길을 걸으며 내면 정화 작업을 통해 복잡한 마음을 투명하고 맑게 만들어 가고 있다. 걸으면서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괴로움을 멈출 수 있었고, 그 멈춤의 힘으로 다시 힘을 내어 힘든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인터뷰 끝날 시간쯤 아들이 전화를 했다. 지금 아들은 뛰는 것은 조금 무리지만 일상생활에 전혀 무리가 없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는 전화를 받고 음식 준비를 위해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에서 활기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해파랑 길에서 보았던 절망적인 뒷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변한 것이다. 해파랑길을 모두 마친 그녀는 요즘 매월 남파랑길을 따라 걷고 있다. 남파랑길 다음에는 서해안길과 평화누리길을 걸을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걷는 날이 올 것이다. 길이 그녀를 부르고, 그녀는 반갑게 그 부름에 화답하며 걷고 있다. 그녀의 인생 후반기를 위한 활기찬 걷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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