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할 땐 도전하더라도 안전장치는 꼭 만들기
☕️Meet 상인상인님은 식품연구소 메뉴개발자로 6년간 일했고 2020년 1월부터 ‘지속상점’이라는 세종시 로컬푸드를 이용한 작은 브런치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2018년 6월 결혼하면서 남편 직장 근처인 세종시에 집을 구했어요. 대기업을 퇴사하고 나만의 브랜드로 가게를 차리게 된 이야기 들어봅니다.
1년 조금 넘게 서울-세종 출퇴근하셨어요.
저는 서울에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남편은 대전에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거리 연애를 2년 넘게 했어요. 남편이 경기도로 근무지를 옮겨보려고도 했지만 잘 안 됐고, 저도 경력을 유지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세종으로 이주하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결혼을 준비하면서 거주지를 어디로 할지 남편과 상의하다가 우선 세종에 집을 구하고 제가 출퇴근을 해보기로 했어요. 제가 다녔던 회사가 양재역이라 고속버스를 이용하기 용이하기도 했고, 집도 세종시 고속터미널 근처로 구해서 출퇴근 시간/거리를 최대한 효율적인 루트로 잡으려고 했죠. 서울에서 지낼 집을 구하지 않아서 매일 출퇴근해야 했어요. 하루에 4시간 정도 버스를 타니까 목 베개와 방석을 늘 들고 다녔고요. 대신, 남편이 대부분의 집안일을 다 맡아서 했어요. (웃음)
장거리 출퇴근으로 오는 피로감 때문에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싶었을 것 같아요. 남편분도요. 이직에 대해선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저는 잔인하리만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편인데요. 남편과 저는 동갑이고 군대 때문에 늦게 취업하다 보니까, 결혼할 당시 저는 경력 5년 차였고 남편은 2년 차였죠. 객관적으로 남편은 이직하려면 현재 회사에 몇 년 더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더 적극적으로 이직 기회를 알아봤어요.
그리고 성향상 남편은 안정을 추구하는 공대생이고 현재에 만족을 잘하는 편이에요. 이런 것도 재능이라 생각해요. (웃음) 저는 무언가를 계속하고 싶어 하고 경력 개발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더 높은 편이죠.
이직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가장 오래 일해온 식품 연구 개발 분야로 이직하는 것을 목표로 식품연구소가 있는 회사채용 사이트에 수시로 들어가서 경력직 채용이 있는지 확인했어요. 헤드헌터들을 통해서도 지원했고요. 제가 부족해서 떨어진 경우도 있고 연봉이나 직급 등 조건이 안 맞아서 안 간 곳도 있었죠.
누울 자리를 보고 눕는다고 하죠. 미리 안전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한 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편이에요.
그 중엔 P회사도 있었는데요, 마침 이 P회사가 오송에 연구원을 이전한다는 계획이 있었어요. 오송이면 세종이랑 아주 가까우니까 기대감이 컸었죠.
최종 면접에 가기 전 결혼반지를 뺄까 말까 고민했어요. 자녀가 없는 기혼 여성이라는 점이 큰 리스크라고 생각될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다른 회사 중에 자녀 계획이 있으면 채용 안 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팀장님도 있었어요. 반지를 뺄까 말까 고민하다가 속이는 것 같아서 안 빼고 들어갔습니다. 면접관이 힐끗 반지를 보시더니 “결혼 하셨나 보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네”라고 말하며 하하호호 웃어넘겼죠, 뭐.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떨어졌었어요. 괜히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되는데 반지는 뺄 걸 그랬나요?
채용 시장의 성차별로 느껴지셨을 수도 있겠어요.
회사 입장에서는 1~2년 육아휴직을 쓸 수도 있는 사람인 거죠. 저도 신입 시절에 누군가의 육아휴직으로 일을 떠안아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민폐는 되기 싫은데 방법은 없는 상황이고. 이걸 이직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어요.
임신과 출산을 하는 당사자는 저니까 직업적 불안정성은 제가 더 높고 경력이 끊길 수도 있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가족의 경제력을 고려했을 때 제가 세종으로 이주하고 남편이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판단했어요.
슬프지만 현실적인 판단이었죠. 이런 현실을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현실을 못 받아들이면 무기력해지거나 우울해지는데요. 이 과정에서 남편이랑 많이 싸우기도 했죠. 돌이켜보니,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나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못 받아들이니 짜증이 나는 거죠.
이직 준비 과정에서 세종/대전 지역 기업으로 한정하지 않으셨는데, 경력 개발이 가장 큰 목적이었나요?
그렇죠. 세종과 대전에서는 딱 맞는 일자리가 없었어요. 그나마 제일 잘 맞았던 곳이 오송 이전 계획이 있는 회사였고. 최종면접이 틀어지니 이젠 방법이 없구나 싶었죠.
그럼 퇴사하고 세종에서 창업을 준비하셨나요?
아뇨. 세종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운영하는 <세종 청년창업 챌린지랩>의 최종 창업팀으로 합격한 다음에 퇴사했어요. 이 프로그램은 타깃 시장과 초기 아이템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공간과 창업 자금을 지원해주니, 혼자 창업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안정적일 거라 생각했죠.
지역에서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인데, 경험은 어땠나요?
안타깝게도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이 회의론적인 분위기에요. 아직 세종은 시장도 준비가 안 됐고 참여 창업팀들도 성공할 창업가가 아니라는 거죠. 발대식에서 창업 상담을 신청했는데, 멘토라는 분이 사업계획서를 읽어보더니 “이런 걸 창업한다고요? 세종이 관광 도시에요? 본인이라면 사시겠어요?”라고 비웃는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 잡아주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니 당황하시더라고요.
이 멘토는 누구길래 남에게 이렇게까지 무례할 수 있는지 찾아보니, 농산물 온라인 판매 채널에 상세 페이지를 제작하는 비즈니스를 하면서 창업 교육 강사로 일하는 분이더라고요. 창업 교육 석사 학위가 있으시고요. 약력만 보고 멘토를 선정한 것은 아닌지 의아했어요. 청년 창업가를 지원한다면서 오히려 의지를 꺾으셨으니까요.
결국 멘토링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 창업이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려고 욱여넣은 느낌이에요.
‘지속상점’ 창업 당시 비즈니스 모델은 로컬푸드 상품 소싱 및 개발이었는데요. 로컬 푸드로 컨셉을 잡은 이유는 뭘까요?
세종은 로컬 푸드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잘 되어있어요. 심지어 시청에는 로컬푸드과가 있죠.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해요. 지자체 차원에서도 로컬푸드를 상품화하는 거에 관심이 있어 하니까, 사업성을 보고 시작했죠.
예를 들면, 세종시 삼광쌀은 농촌진흥청에서 육종한 최고품질 쌀로 쫀득하고 달큰한 밥맛으로 유명해요. 지속상점은 이 세종시 삼광쌀을 새롭게 브랜딩해서 상품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업화 과정에서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농부들과의 협업이 중요한데 생각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어요. 미팅하면서 제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한 분 한 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 지자체의 도움을 받기에는 제 개인의 파워가 아직은 크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죠. 그래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마음으로 가게에 ‘브런치 메뉴'도 추가했어요.
남편은 창업을 지지했나요?
남편은 제 결정을 지지해주는 편이지만 창업하고 나서는 글쎄요 (웃음) 창업하기 전에는 일터에서 힘들어도 나 혼자 힘든 거고 퇴근 후엔 집에서 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였다면, 창업한 후에는 남편까지 일에 투입되니까 집에서도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요. 의견 차이가 생길 때도 있고요. 이런 식으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 과연 지속가능한 건지에 대한 물음표는 있죠.
창업을 직접 해보니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나를 갈아 넣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라는 거였어요. 가게도 일부러 혼자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어요. 저 혼자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거죠.
상인님 입장에서 가게의 지속가능성은 어떤가요?
좋은 점도 있고 힘든 점도 있어요. 요리는 체력적 한계가 있으니까 출산을 계획한다면 요리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지금처럼 브런치 가게를 운영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도 생각하고 있어요.
내 가게를 운영하는 것의 장점은 뭔가요?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가족과 보낼 시간을 내가 스스로 설정할 수 있고 운영 시간도 날짜도 정할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자기 결정권이요. 회사와 비교했을 때, 의사 결정 절차가 줄어드는 것도 좋아요. 메뉴 개발 자유도가 매우 높죠.
자율이 중요하군요
맞아요. 그런데 틀도 중요한 것 같아요. 뭐든 다 만족할 수 없구나 싶네요. (웃음)
지속상점의 메뉴 개발 프로세스는 회사와 어떻게 다르나요?
회사에서는 개발해야 할 메뉴가 내려오죠. ‘가을이니까 밤을 이용한 메뉴를 개발하라’와 같은. 그리고 컨펌이라는 과정이 있는데, 파트장님, 상무님, 회장님, 감사님, 마케팅 전무님, 소비자 평가 등 모든 절차를 통과해야 출시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입맛은 개인 취향이잖아요. 결국 한 사람의 입맛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바로 오너죠! 오너 말을 들어주는 게 직원의 할 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때는 어렸을 때라 답답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지금 하는 개발은 제가 OK 하면 됩니다 (웃음) 즉흥적으로 가능하고요. 제 머릿속에 있는 걸 풀어내며, 내가 좋아하는 걸 해요. 쑥와플, 딸기샌드 등 메뉴판에 없는 자잘한 계절 메뉴들을 바로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해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걸 다 해보며 답답함을 풀어요.
내 감을 믿고 바로 실행해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장점이에요. 그런데 상인님은 셰프가 원래 꿈이셨어요?
어머니가 요리를 잘하셔서 어릴 때부터 같이 요리하는 걸 좋아했어요. TV에서 제이미 올리버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조리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저같이 제이미 올리버 때문에 조리학과에 온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웃음) 요리를 하다 보면 희열의 순간이 한 번씩 탁 와요. 대체로 힘들지만 원하는 걸 개발할 때의 그 순간의 희열이 중독적이에요.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요리사의 가장 큰 단점은 체력이에요. 몸이 빨리 상하거든요. 남자도 30대 후반이면 현역에서 일을 못 해요. 특히 여자 요리사들은 임신, 출산, 육아하면서 체력적으로 요리사 일을 유지하기 더 어렵죠.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 문예 창작을 복수전공했어요. 출판물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요리 잡지 기자로 일하면 어떨까 싶었거든요.
조리학과 졸업 후 입사한 첫 회사가 잡지사라니 특이해요.
처음에 다녔던 회사는 국내외 호텔과 레스토랑 소식을 전하는 잡지사였고 저는 에디터로 일했어요. 직종은 천직이었어요. 좋아하는 걸 다하니까요. 셰프를 만나고 글을 쓰는 일이 잘 맞았어요. 야근해도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는 게 재밌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연봉 때문이었어요. 수습 초봉이 월 60만 원이고 정규직은 월 100만 원부터 시작했거든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월세, 식대, 교통비를 빼고 나면 점심을 사 먹는 것도 부담스럽더라고요. 장기적으로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렇지만 유명한 레스토랑 셰프들 만나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제가 못 가본 셰프의 길을 한 번 가볼까? 란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 호텔에서 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에서 셰프로 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해외 취업포털사이트 월드잡의 취업 연계 프로그램에 합격해 하얏트 호텔 요리사로 1년 동안 일했어요. 교환학생을 유럽으로 다녀왔으니 셰프는 미주권에서 해봐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죠. 1년 이후에도 잘 맞으면 취업 비자를 연장해 더 일할 수도 있었고요.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요?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퇴근하면 취업 사이트 소식을 살펴보며 하반기 신입 공채로 지원서를 썼죠. 그리고 서류 전형에 합격한 몇 곳이 있어서 한국으로 귀국했어요.
와, 정말 이성적이고 치밀해요.
본래 성향이 이성적이라기보단,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다 보니 안전장치를 계속 찾는 거죠. 불안함이라는 게 좋지 않은 성향이겠지만 나름 저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링크드인에도 최신의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두신 거군요!
일단 기회를 열어 두는 거예요. 헤드헌터들이 종종 연락을 줘요.
과감한 도전처럼 보여도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정리해보면, 기자는 연봉이 안 맞았고 셰프는 워라밸이 안 맞았어요. 식품회사 연구원은 연봉과 워라밸이 되는 직장이라서 입사했죠. 지금은 삶과 가족이 더 중요해서 창업을 선택했어요.
그다음은 어딜까요?
이제부턴 제가 안 해본 거라 모르겠어요. 만약 아이를 낳고도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이죠.
만약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어도 고민이었을 거예요. 가족을 챙기면서 회사에 다니려면 한직에 있어야 하는데 제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세종에 와서는 미래가 더 잘 안 보여요. 서울에 있으면 정신없이 정해진 노선을 빠르게 달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경력 노선을 완전히 바꾸고 내려온 상황이니까요.
지금 영양사 공부하는 건 어떤 안전장치인가요?
이제야 엄마 말을 듣는 거예요. (웃음) 제가 한창 힘들어할 때, 엄마가 영양 교사도 하나의 선택지로 생각해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엄마도 언니도 선생님이라서 그 삶을 지켜보니 왜 그런 조언을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중간에 멈출 수도 있겠지만, 면허니까 도전해보기로 했어요.
상인님에게 지속가능한 일이란 뭘까요?
버티는 거요. 열정으로 시작했어도 그다음은 버티는 것이 중요해요.
열정으로 시작했어도 그다음은 버티는 것이 중요해요.
최근 사업가이자 백만 유튜버인 신사임당 <포기하지 않는 방법> 영상의 이 말을 듣고 뼈를 심하게 맞았어요!
“열정이 식고 나면 본 게임이 시작된다. 지속력이 중요합니다. 식어버리는 열정을 만드는 것보다 지속력을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에요 (..) 열정은 고통을 마취시키고 지속력은 고통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¹ "
20대와 달리 30대가 되니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와 같은 조언들이 안 먹혀요.
20대는 성취, 30대는 안정성이 키워드에요. 가장 안정성이 떨어지는 시기라서 그런가 봐요. 40대는 또 다르지 않을까요.
‘지속상점’의 다음 계획이 궁금해요.
중소벤처기업부의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 면접을 앞두고 있어요. 이게 되면 본격적으로 상품 개발 기획해서 판매/유통하려고요. 강릉의 커피빵, 해남의 고구마빵, 여수의 동백빵과 같이 지역의 특산물인 복숭아를 이용한 복숭아빵 같은 걸 개발해보고 싶어요.
요즘은 예전 개발한 쌀스테라를 변형해 작은 사이즈의 선물용 빵을 테스트해보고 있어요. 선물세트로 한번 구성해보려고 해요. 빵도 제 인생도 어쩌면 지금이 테스트 버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대로 잘 나와주기만 한다면야 몇 번이고 테스트할 수 있겠지요?
✍️Editor’s Note by 유진
세종에 와서 놀란 점 중 하나가 프랜차이즈 식당이 정말 많다는 점이었다. 본래 이 땅이 아무것도 없던 논밭이었으니 지역 특색을 담은 식당이 없다는 건 당연한 결과이지만, 내심 아쉬웠다. 그러다 세종의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제품과 브런치 메뉴를 파는 ‘지속상점’을 우연히 발견하곤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들떠버렸다.
지속상점의 사장, 상인님은 기자에서 셰프로, 셰프에서 메뉴개발자로, 메뉴개발자에서 가게 사장님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왔다. 멀리서 보면 꿈을 찾는 낭만적인 여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 커리어의 안전장치(육아휴직이 가능한 회사든 자격증이든 뭐든)를 하나씩 만들고 경력을 이동했다.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뒤, 의지력을 발휘한 것이다.
세종으로 이주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직업을 가지게 된다는 건, 내가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커리어 노선을 걷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더욱 정해진 길도 없고 어디가 안전한 길인지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상인님이 그동안 갈고 닦아온 현실 감각을 발휘해 준다면, 이 원시림에도 길을 낼 수 있진 않을까 멀리서 마음을 보태어 본다.
인터뷰 일자: 2020년 8월 30일
1. 주언규. [신사임당] 포기하지 않는 방법. YouTube.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