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엄마가 필요해
두 달 반 만에 만난 엄마는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 집에 들어오셨다. 얼마 전부터 내 몸 여기저기가 아파 엄마에게 호출을 했었다. 딸이 아프다는 말에 바로 오신다고 하셨다. 이제는 내가 지쳐서 어느 누구의 도움이 절실했다. 고속버스만 3시간 넘게 타고 오셨지만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손자를 보며 입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으셨다. 엄마의 밝은 표정을 보며 마음의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집에서 만들어온 반찬을 가방에서 꺼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 만들면 되지, 왜 힘들게 들고 왔어”라고 나는 구시렁댔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거름망도 없이 마구 튀어나왔다. 집 앞에 있는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만들어주겠다는 엄마에게 지금도 충분하다고, 다 못 먹는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원래 엄마한테 자주 투덜대긴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엄마가 해 주시는 반찬과 밥, 국 모든 것이 다 좋았다. 평소에 내가 차려서 먹을 수 없는 반찬이고 밖에서 사 먹을 수도 없는 귀한 엄마가 해준 밥이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챙겨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울컥해서 사진을 찍어두기도 했다. 엄만 하루 종일 우리 집을 닦고 청소를 하셨다. 내가 신경 쓰지 않는 베란다까지 모두 정리를 하셨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이번만큼은 엄마가 하자고 하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 하는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우리 아기가 할머니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번진다. 엄마 껌딱지였어도 할머니가 옆에 있으니 졸졸졸 따라다니며 같이 놀자고 한다. 아이에게 할머니는 엄마, 아빠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오셨던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잔잔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일주일 동안 엄마가 계시면서 우리 집은 참 많이 깨끗해졌고 냉장고가 풍족해졌다. 아이와의 웃음소리가 집을 가득 채웠다.
집으로 가실 날이 다가오니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속상하기까지 했다. 집에 가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기에 며칠 더 계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잠든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눈물이 났다. 누가 나를 이렇게 돌봐줄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한들 진짜 내 부모만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매번 엄마가 집에 가실 날이 다 되어 가면 ‘잘할걸’ 하는 아쉬움만 남는다. 이제 뭘 할까. 뭘 먹을까. 사진이라도 같이 많이 찍었어야 했는데. 평소에 잘 하자는 건 왜 마지막에 생각나는 걸까.
남편이 터미널까지 엄마를 모셔다 드렸다. 아이를 재우고 방에서 나오니 고요하다.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려 서재로 들어와 낮에 읽던 책을 계속 읽었다.
“너를 보니 반갑구나, 베르나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쥐가 몇 마리 나왔기로서니 대수로운 일이겠느냐.”
아들도 동감이었다. 사실 어머니만 있으면 무슨 일이건 다 수월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몸이 아픈 날이 반복되었을 때 아기와 나, 둘이 있으면 오늘이 힘들고 다음날을 걱정하며 남편의 퇴근을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실 때 그런 걱정은 날아가버렸다. 남편이 언제 올지, 미용실에 갔다 올지, 내 몸 아픈 부분이 얼마나 나을지, 상태가 괜찮아질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엄마만 내 옆에 계시면 이 상황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나아질 거란 믿음이 크게 다가왔다. 그저 나에게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일상이 한결 수월하고 즐거웠다. 그만큼 엄마는 나에게 무척이나 큰 존재였다.
밤 12시가 넘어 엄마에게 전화했다. 버스는 내렸는지, 집에 다 와가는지, 묻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눈에선 눈물이 나고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내 입은 웃고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딸인 나를 걱정하며 돌보고, 짜증 내며 우는 손자여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엄마. 아기 엄마가 되어보니 내 엄마의 존재가 절실하고 감사함은 배로 더 커짐을 느끼고 있다.
오늘 내가 엄마에게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영상통화를 걸었다. 전화 대기 화면을 보며 할머니를 기다리는 우리 아기,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나오자마자 활짝 웃는다.
“세온아~ 할미다! 할아버지도 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