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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Aug 15. 2021

풀 뜯는 사람은 은근히 시달린다

초식인도 뼈를 때리고 싶다

나는 조직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의견을 잘 내지 않고, 시키는 일은 되도록 군말 없이 하는 편이며, 항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지낸다. 내성적이면서 안정적인 환경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이러한 생존법이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 처세술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렇기도 하다. 


나는 불만을 표현해서 분위기가 나빠지면 감정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또한, 남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표현을 적극적이고 직설적으로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보다 차라리 감정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내가 너무 예민한 스타일이어서 그런 건가 고민도 많이 했었다. 주변의 환경변화나 인간관계의 변화에 왜 추풍낙엽처럼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지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다. 부들부들한 갈대가 바람에 쉽게 흔들리듯이, 부들부들한 마음은 상황에 따라 쉽게 왔다 갔다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내성적이고 조용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직설적이고 분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의사결정을 빠르게 내리는 편이고, 결단력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만 생각이 맴돌 뿐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는다. 내가 티를 내는 순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느끼곤 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이중적인 존재이다.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수그리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가차 없다. 적극적이면서 외향적인 사람이 의견을 강하게 내면 어느 정도 인정을 한다. 하지만 나처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의견을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마치 조용한 사람은 계속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초식남들은 입을 닫게 된다.


언젠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 내지는 아랫사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상대방의 이미지에 상대방이 맞지 않게 행동하면 가식을 떨거나, 자신에게 덤빈다고 판단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생각이 맞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직장상사들은 활동적인 직원보다 조용한 직원에게 더욱 가혹하다. 예로 들면, 얌전한 직원이 칼퇴근을 하려고 하면 눈치를 주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센 직원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 마치 얌전한 직원은 계속해서 얌전하게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법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나는 예의를 차린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삼가거나 표현하지 않는 문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좋고 싫음, 필요와 불필요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그리고 그렇게 활발하게 소통해야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싫어도 좋은 척을 하거나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리고 초식남들은 특히나 더욱 예스맨이 되어주기를 상대방에게 강요받는다. 누군가가 눈치 없이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해도 못 들은 척을 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주말에 자기와 어디로 출장 좀 같이 가달라고 할 때 후환이 두려워 별말 없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초식남도 할 말은 하고 싶다. 그런 말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그런 얘기 하면 안 된다고 신사적으로 돌려서라도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원래 성격 때문에, 그리고 초식남은 조용하고 얌전해야 한다는 타인의 반강요 때문에 입을 닫곤 한다.


그러고는 안 보이는 곳에서 불만을 표현하며 화를 삭힌다.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되냐고 따지기도 하고, 왜 자신이 희생해야 하냐고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면전에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하는데 참 쉽지 않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요즘은 다른 사람에 관해 뒷담을 까는 사람은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의식이 퍼져나가고 있다. 초식남으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앞에서도 아무 말 못 하고, 뒤에서도 아무 말 못 하면, 어디서 화를 풀어야 하나.


초식남으로서 나는 직장생활을 하든, 인간관계를 맺든 스트레스가 높은 편이다. 겉으로 목소리를 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시작부터 아랫사람이 된 것 같아 불편하다. 괜히 상대방이 나를 막 대하는 것 같고, 내가 희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내 먹거리를 찾아오지 못하는 것 같아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이런 부탁을 해도 괜찮을까 괜히 전전긍긍한다. 미움 사지 않기 위해 내 목소리를 계속 숨기게 된다.


말하기 전에 주변에서 챙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사회는 각자도생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아무리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지만,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말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 같으면 대신 말해줄 수도 있다. 고민이 있어 보이면 먼저 물어볼 수도 있다. 상대방이 의견을 제시하고, 불만을 표현한다면 일단 무조건 들어줘야 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상대방에게 말하기 전에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상대방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먼저 한번 고민해봐야 한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채찍질만 해대는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는가. 이제는 나 혼자 달리지 않고, 같이 달리며 챙겨주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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