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모자 Oct 31. 2021

기계 부품이 아니라 인간이잖아요

최소한의 인간다움

최근 손에 습진이 다시 생겼다. 커피를 탈 때 사용하는 티스푼을 모아둔 컵을 사무실에서 아침마다 설거지하느라 그런 것 같다. 땀이 손에 자주 나는 체질이어서 원래부터 습진이 쉽게 생기곤 했었다. 규칙적으로 따뜻한 물을 만지면 손이 가려워지면서 빨갛게 올라오곤 한다. 정말 정직하다.


집에서 엄마에게 맨손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더니 손에 습진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왜 그걸 네가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내 동기도 있고, 나보다 후배이면서 서무 업무를 하기 위해 들어온 계약직 직원도 있다. 습진이 생기기 쉬운 손이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해도 될 텐데, 왜 계약직 직원을 시키지 않고 내가 하냐는 의미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권위주의를 싫어한다. 그래서 선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 설거지, 서무 업무 등에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업무는 각자의 직위와 직급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누어질 수 있다. 하지만 탕비실을 정리하는 일, 민원 응대를 하는 일 등의 업무 외적인 일은 누가 할지 정해져 있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업무 외적인 일들은 선배든 후배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침에 화장실 가는 길에 티스푼 컵도 가져가서 닦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청소를 할 때라면, 막내가 청소기를 밀면 다른 선배는 대걸레를 밀고, 또 다른 선배는 탁자를 닦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꼭 말단 직원들만 잡일을 해야 하나 싶어서 나는 같이 하려고 하는 편이다.


사회가 점점 분업화되어가면서 각자의 수직적 위치도 무 자르듯이 구분하려는 것 같아 늘 씁쓸하다. 나는 너보다 경력도 높고, 나이도 많고, 하여튼 다 많다는 이유만으로 하기 싫고 위험한 일을 누군가에게 전부 몰아주는 건 정당한 일이 아니다.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이 기계 부품인 것처럼 각자의 업무를 각자 수행하는 기계적인 조직에 속해있기는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이지 않나. 본 업무 외의 일은 기계 부품이 아닌, 인간처럼 수행해도 되지 않나.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서도 나는 그 컵을 내가 여전히 닦고 있다. 습진 때문에 찬물로 닦고는 있지만, 안 그래도 여러 잡일을 하고 있는 계약직 직원에게 모든 걸 맡기고 싶진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도 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하고 싶다. 가만히 앉아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는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삭막한 사회생활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모두와 함께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으니까.


이전 05화 챙겨주지 못하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