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는 연차휴가, 즉 근로법이나 회사 방침으로 정해진 휴가 일수가 따로 없다. '1년에 15일', 이런 식으로 회사에서 최대 휴가기간을 제한하지 않을 분더러 '한 달 근무에 하루 생성'처럼 조건을 달지도 않는다. 각자 자기가 처한 상황과 계획에 따라 출근을 안 하면 그게 그냥 휴가다. 대단한 계획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호사도 아니고 동료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아니면 상사가 싫어할까 봐 염려해야 할 일도 당연 아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일 말고 다른 일을 돌봐야 할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적어도 1년에 15일보다는 훨씬. 그러니 애초에 굳이 회사가 나서서 제한할 일이 아니다.
이런 무제한 휴가 제도가 가능한 것은 팀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기업문화 덕분이다. 자기 업무 성과나 평판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무리하게 휴가를 다닐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간혹 있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공산이 크다. 잘릴 테니까. 중요한 건 자기 업무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근무일수를 채우는 게 아니다. 어차피 나 같은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은 꼭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니 '1년에 최대 며칠' 같이 시간으로 규제할 게 아니라 성과로 평가하는 게 합리적이다. 최소 휴식을 보장하는 근로자를 위한 보호장치로써의 연차 제도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게 본질이 아니란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회사에 정해진 휴가 일수가 없다는 사실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어떻게 휴가 결제를 받는가'하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연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승인이나 결제 절차도 없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휴가 전에 팀장님한테 허락을 받는 절차 정도는 있겠지' 싶을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엔 당연히 그럴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정말이지 없다. 그저 자기 업무 일정에 맞춰서 휴가를 계획하고, 날짜를 아웃룩Outlook 팀 캘린더에 공유하고, 자기가 자리에 없을 때 업무에 차질이 가지 않도록 사전조치만 취해놓으면 끝이다. 팀장 일은 팀장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듯 휴가도 마찬가지다. 내 휴가는 누가 결제 혹은 허락해줄 필요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가끔은 부득이하게 휴무일과 중요한 회사 일정이 겹칠 때도 있다. 우리 회사는 코로나 팬데믹이 터진 이후 직원들의 건강 및 사기 증진을 위해 월 1회 정도 CEO의 재량으로 전 회사 차원의 임시 공휴일을 지정해 운영해왔다. 그런데 한 번은 내가 속한 사업본부의 분기말 업무 일정상 회사 임시 공휴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우리 팀장은 유감이라면서 이번 공휴일에 업무상 불가피하게 쉴 수 없는 팀원들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꼭 챙겨 쉬라고 했다. 혹시나 까먹고 넘기지 않도록 미리 캘린더에 표시해 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 근데 다들 한꺼번에 휴가 가버리면 곤란하니까, 서로 날짜를 의논해서 겹치지 않도록 꼭 신경 써줘.
물론 이런 언제고 꼭 한 번 들어본 것 같은 당부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팀 내 다른 동료들, 특히 직급이 높은 선배들의 휴가 일정을 피해 후순위로 휴가 날짜를 정하고, 당연한 내 권리인데도 무슨 '휴가 목적' 따위를 기재하고, 내 업무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무의 결제까지 받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의도에 '더현대 서울'이 없던 시절.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선진 문물이 없던 시절 얘기지만 말이다. 에이, 설마. 요즘에도 그러는 회사는 없겠지.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