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합류제의를 받았다. 동업제의를 받은 건 이게 다섯 번 째인데, 가장 특이한 여건이어서 메모를 함. "이런 예비스타트업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읽으면 될 것 같다.
지금까지 같이 스타트업을 하자고 제의를 한 팀은 대부분이 손에 돈이 한 푼도 없는 팀들이었다. 근데 이 팀은 돈이 많았다. 학생창업팀들과 비교하면 뒤에 0이 2~3개 더 붙은 수준이었다.
인프라도 이미 튼튼하고, 시장상황도 꽉 잡고 있었다. 경영진들의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도 수려하다. 3년, 5년, 10년 뒤의 단계적인 계획도 잡혀 있었으며 순환출자같은 리스크회피전략 기법도 화려하게 구상하고 있었다.
내가 평가하기에, 굳이 벤처적인 요소를 섞지 않고 정석적으로 시장에 진입해도 첫 해에 십억대의 매출을 달성할 여력이 있어 보였다. 3년 안에 백억대 매출 달성을 바라보고 창업을 시작한다는데 솔직히 그렇게 자릿수가 큰 숫자의 돈은 잘 가늠이 되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그 팀의 대표와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서 그 자리에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동업은 사람을 보고 하는거라던데. 그런데 이 팀이 가진 자본은 이 팀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존재를 흐릿하게 가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전하지 않았다. 몇 가지 걸렸던 점들이 아래와 같다.
1. 비즈니스 모델 수익구조가 섹시하고 리소스가 풍부해 보이지만, 이 팀을 움직일 OS가 어떤 형태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비즈니스 모델은 "팀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가동하여 가치를 재생산하고 전파할 것인가"로 정의할 수 있을텐데, 이 부분이 불투명하여 내가 설득되지 않았다.
2. 성장 가능성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 아니라 나의 성장 가능성. 이 팀에 들어가면 나는 어떤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이 부분이 불투명했다. 확실히 돈은 챙길 것 같은데, 지금 25살의 나와 이 팀을 거쳐 35살이 된 10년 뒤의 내 가치가 어떻게 더욱 발전할 것인지가 닿지 않았다.
3. 시기 이 팀이 그리고 있는 후속 사업에는 솔직히 관심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고, 내가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초기 사업과정에서 참가해서 견뎌나갈 자신이 없었다. 병특이 마무리될 시점이나 학위가 나올 시점에 이 팀이 다시 찾아와 나를 설득한다면 아마 지금과는 결론이 달라지지 않을까.
4. 위험성 이야기 딱 듣는 순간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위.메.이.드. 이게 떠오른 순간부터는 불명확한 이야기는 "준비가 덜 된 사항"이 아니라 "내게 설명하지 못 할 사항"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오늘 내린 결정이 이불킥이 될지 잘 한 선택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스티브잡스의 제안을 걷어찬 딘 카멘이 되어 오늘의 경험이 훗날 내가 쓸 "실패하는 스타트업"의 한 챕터로 기록되는 커다란 오판으로 남을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