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탕국

by 한유당


그 집에는 커피가 없습니다. 커피를 사러 갔는데 커피는 없답니다. 메뉴에는 카페라떼도 있고 카푸치노도 있는데 커피 또는 아메리카노는 찾을 수 없습니다. 메뉴판의 제일 위에 적힌 이름도 낯선 양탕국을 마셔보라 권합니다. 서울에 온다고 나름 차려입고 왔는데도 내가 지방에서 온 촌사람으로 보이는지 촌스러운 이름의 메뉴를 권하나 싶기는 했지만, 응대하는 직원의 고운 말투와 얼굴을 보니 한번 믿고 마셔 보아도 될 듯 싶습니다.


양탕국 을 시켰습니다. 진한 갈색 빛깔도 고소한 냄새도 익히 알고 있는 그 아메리카노입니다. 아, 양탕국은 커피의 옛이름 이었습니다. 백 년 쯤 전에 처음으로 커피를 접한 백성들이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이 서양에서 온 탕약 같다고 그리 불렀답니다. 값비싼 설탕을 듬뿍 넣은 가배는 귀하신 궁궐 안의 왕족들이 드시는 것이고 탕약처럼 검고 쓴 액체를 서양 탕약으로 불렀던 거지요.


서양에서 물 건너 온 탕약이 백 여년 쯤 지나고 나니 누구나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습니다. 거리마다 크고 작은 상점들이 앞 다투어 호화로운 장식과 푹신한 의자를 두고 이 서양 탕약을 팔고, 음료회사들은 최고로 잘 생기고 인기 좋은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워 광고를 합니다. 서양 탕약은 이제 집에도 일터에도 도시나 시골이나 없어서는 안 되는 기호품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양탕국은 탕약과도 비슷한듯도 싶습니다. 마시면 향도 좋고 기분도 좋고 머리도 맑아지니 제게는 약이 맞는 듯 합니다.


양탕국 한 잔을 손에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멀지 않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 건물을 향해 곧장 걷습니다. 푸른 팔작지붕을 더 푸른 청록색의 기둥들이 떠받히고, 처마와 난간에는 황금색의 정교한 조각들이 장식되있습니다. 윗부분에는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하얀 오얏꽃이 금방 핀 듯 돋을새김 되어 있는 아름다운 집입니다.


그 집의 이름은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입니다. 조용히 내려다보는 집이랍니다. 조용히 내려다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입니다. 웅장한 중화전과 화려한 석조전에 가려 있지만 아담하고 고즈넉한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정관헌은 왕께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쉬는 곳이었답니다


그 집에서 왕은 자신이 가배라 부르던, 백성들이 서양 탕약이라 부르던 음료를 마시며 조용히 내려다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보고 있는 것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왕이 그곳에 머무르셨던 오래 전 그때나 내가 서있는 지금이나 궁궐의 높다란 담장 밖의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백성들은 먹고 사는 일이 어렵다고 합니다. 외세의 침략이든 내부의 분란이든 전염병의 창궐이든 혼돈의 시절은 도무지 끝 보이질 않습니다


한 김이 빠진 양탕국을 마십니다. 정관헌 푸른 기둥에 기대어 마시는 양탕국은 진하고 향기롭습니다. 황금빛의 휘장이 드리운 건물 안으로 넓고 단정한 테이블과 붉은 색의 고풍스런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가서 앉아봅니다. 내가 아는 한, 이 궁궐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슬픈 한 남자가 거기 앉아계십니다. 황제라 불렸으나 주권과 통치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을 나라 없는 식민지의 곤궁한 삶으로 떨어지게 한 왕입니다. 한 여자의 지아비였으나 아내를 지키지 못한 아프고 슬프고 부끄러운 한 남자가 그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검고 쓴 양탕국을 앞에 두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비애를 달래면서 말입니다.


그때의 역사를 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무능한 왕이 나라를 망쳤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가 가진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시대의 물결 앞에서 절망했을 쓰디쓴 왕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나는 정치도 역사도 경제도 잘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담장 너머에 궁궐밖 광장에는 서로 다른 무리가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칩니다. 도는 말들이 담을 넘어 조용한 궁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가파르고 격앙된 말과 구호와 서로를 향한 비난의 소리가 난무합니다. 서로의 말들이 엉겨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그들 사이에 다가가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 말을 멈추고 따뜻한 양탕국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어떻겠냐고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배우라고 합니다. 백 여년 전 이 집에 앉아 그저 조용히 내려다보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었던 왕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와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비극을 푸른 지붕에 사는 분들은 기억했으면 합니다


양탕국이 식었습니다. 조용하지 않은 날 찾아 온 조용히 내려다보는 집에서 양탕국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용해진 어느 날, 다시

이곳을 찾아오려 합니다. 그때 저랑 조용하게 양탕국 한 잔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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