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그건 뭘 배우는 건데요...?
어린 시절 나에겐 작은 소망이 하나 있었다.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내 방으로 들여오는 거였는데, 나와 피아노의 거리를 가깝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피아노가 거실에 있으면 아빠가 TV를 보지 않을 때, 엄마의 공부방을 찾아 온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러니까 거실이 비어있을 때에만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피아노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내 방은 침대와 책상 만으로도 거의 꽉 차서 피아노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피아노를 내 공간 안으로 들여와야 겠다고 졸랐다. 나는 피아노에 기꺼이 좁은 방의 한 켠을 내주고 싶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언제든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치고 싶을 때 마음껏 칠 수 없음'은 당시 나에겐 꽤나 서글픈 일이었던지 나는 매번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시험 끝나면 맘껏 쳐야지, 대학교 가면 맘껏 쳐야지, 취업하면 맘껏 쳐야지, 지금 부서에서 옮기면 맘껏 쳐야지... 맘껏이 가능한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어른이 되고 나니 깨달았다. 어른이 된다고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래서 지금은 '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쳐놓자'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마음껏'보다는 10분이라도, 20분이라도 피아노 앞에 앉자는 다짐이다.
이상하게 삶이 고달플 때 피아노 앞에 앉아보게 된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명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지만, 나는 건반 앞에 앉는다. 한 때는 건반을 온 힘을 다해 누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렸던 때가 있었지만 꼭 그 이유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나 외에 또 다른 자아가 내게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해서 가진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일은 도저히 온전히 사랑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좋아만 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 취미란, 자아 지키기와 비슷한 말이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부터 취업 준비생 때 쓰던 이력서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게 취미란에 적는 답은 늘 같았다. 피아노. 취미 피아노 외길 인생이지만, 한 차례 세부 전공(?)이 바뀌었다. 클래식에서 재즈로. 그래서 지금까지 재즈 피아노 레슨을 (간헐적으로) 받고 있다.
그런데 피아노를 배운다고 할 때는 질문이 없던 사람들이 재즈 피아노를 배운다고 하면 궁금해 한다. 대체 뭘 배우는 거지? 최근에도 이 질문을 받고 그 동안 배운 재즈 화성학 이론과 주법들을 떠올리다 이렇게 얼버무렸다. "아 그러니까... 악보 없이 연주하는 법...?"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고 하면 정형화된 이미지가 떠오른다. 눈으로 악보를 읽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다. 재즈를 떠올리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성인 취미 피아노란 무릇, 특히 처음엔 악보 읽는 것도 어려웠던 곡을 완성한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악보가 없는 재즈는 어떻게 곡을 완성할까? 마침내 한 곡을 완성한다는 목표는 같지만, 완성의 기준이나 정답의 유무가 클래식과는 다르다. 내 마음대로 느낀 바를 설명하면, 작문과 주관식 문제의 차이 같다. 자신의 심상을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잘 쓰고 못 쓴 글을 구분할 수는 있는 작문과 맞히기 어려운 까다로운 주관식 문제.
그럼 난 이 작문을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까. 지금의 목표는 라운드 미드나잇을 제대로 완성해서 연주해보는 것이다. 라운드 미드나잇은 델로니우스 몽크가 1944년 발표해 재즈 스탠더드(재즈 연주자들의 주 레퍼토리)가 된 곡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미셸 페트루치아니의 버전이다. 예전엔 이미 훌륭한 연주자들의 버전을 채보한 악보를 보고 최대한 비슷하게 연주하는 게 목표였다. 비슷하게라도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재즈의 종착지가 아님을 안다. 남들과 다르게 연주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재즈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흉내라도 내고 싶은 곡들은 정말이지 악보를 구할 수가 없다.)
이 곡을 나의 버전으로 소화하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아름다운 합주까지 만들어보자는 원대한 꿈이 버킷리스트에 담겼다. 사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몇월 며칠까지 완료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더라도 그건 버전 1.0일 뿐이다. 어쩌면 20년은 지난 뒤에야 스스로 흡족해할 수 있는 버전 10.0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목표는 달성 시점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성실한 취미인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그 과정 자체,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되는 나의 연주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나의 '자아 지키기' 프로젝트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