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마음대로' 치면 되는 것이라는 오해
‘재즈는 그냥 마음대로 치면 되는 거 아니야?’
재즈는 대체 뭘 배우는 거야?라는 질문에 이은 두 번째 질문은 주로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재즈는 자유로운 음악이라고 알고 있다. 작곡가가 정해놓은 악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연주자의 재량으로 연주하는 자유로운 음악. 이 말은 정해진 것이 없이 즉흥으로, 정형화된 것 없이 불규칙적으로 연주한다는 말로 번역되곤 한다. 반만 맞는 말이다. 재즈에서의 자유란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게 아니었다.
재즈와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책에서 재즈를 설명한 구절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재즈처럼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대신 설명해줬다.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의 경영 철학을 담은 '규칙 없음'에 교향곡을 지향하지 말고 재즈 밴드를 결성한 듯 기업을 경영하라는 말이 나온다. "재즈는 개인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연주자는 음악의 전체 구조를 알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즉흥적으로 흐름에서 벗어나 혼자 흥에 겨워 연주할 자유가 있으며, 이로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음악을 창조해 낸다. 물론 무조건 규정이나 절차를 던져버리고 팀에게 재즈를 연주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음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해서도 안 된다. 즉흥 연주라도 적절한 조건이 없으면 혼란만 초래한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적절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재즈를 그저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음악으로 알고 있던 초보자에게는 그 조건이란 곧 '재즈의 규칙'으로 다가왔다. 재즈가 '그냥 마음대로 치면 되는 것’이 아닌 이유는, ‘마음대로’ 치는 방법부터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악보를 읽고 연주하는 데 익숙했던 내게 코드만 보고 음을 만들어내는 재즈는 너무 어려웠다. 어떻게 연주해야 재즈처럼 들리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칠 수 있을까. 즉흥 연주를 하려고 해도 내가 누르는 음들은 재즈처럼 들리기는커녕 동요처럼 들리는데.
이 비밀을 풀게 해 준 마법의 단어는 '텐션 노트'였다. 화음을 누를 때 섞어주면 금세 재지(Jazzy)한 사운드를 만들어주는 음이 있다. 이 음들은 기존의 안정적인 코드 톤에 긴장감을 준다고 해서 '텐션'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었다. C7 코드를 보면 손가락은 자연스레 도-미-솔-시b으로 옮겨가는 데 텐션을 배우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내추럴 텐션 노트는 9, 13음이다. C7코드로 치면 레와 라가 된다. 코드 구성음을 재즈 보이싱으로 잡아주면 ‘미-라-시b-레’라는 화음이 되는 거다. 처음 이 보이싱을 눌러본 나의 반응은. “이게 C라구요? 세상에나.”
C7 코드에서는 레b, 레#, 파#, 라b도 텐션으로 사용할 수 있다. b9, #9, #11, b13음으로 얼터드 텐션 노트라고 부른다. 얼터드 텐션을 배운 뒤 나는 두 번째 유레카를 외쳤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미-라b-시b-레#으로 눌러도 C7이라구요? 세상에나. #9와 b13이 만나 빚어내는 어두침침한 그 화음을 나는 정말이지 너무 좋아한다. 재즈의 규칙은 이렇게 낯설면서 아름답다.
문제는 좋아하는 텐션 노트가 생기면 (실은 손이 쉽게 가도록 익숙해진 텐션 노트) 계속 그것만 누르게 된다는 거다. 텐션 조합을 '마음대로' 사용하려면 충분히 익숙해져야 하고, 거기에는 많은 시간이 든다. 결국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위해서는 일단 규칙에 맞는 코드와 텐션과 보이싱을 익히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멜로디 라인을 자유롭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케일도 익혀야 한다. 익히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되고 실전 응용이 가능해야 한다. 이론을 알면 뭐합니까. 손가락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데. 그게 나다.
나의 주머니에 사용할 수 있는 음과 기법을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자유롭게 꺼내들 수 있을 때에야 그나마 ‘마음대로’ 연주가 가능하게 된다. 전공하는 학생들은 재즈 곡에서 자주 사용되는, 유명한 프레이즈인 재즈 릭도 외우는 게 기본이라고 한다. 그것도 12Key로 모두. 그다음에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주하며 자신만의 연주를 만들어 낸다. 결국 전문 연주자들이 말하는 '자유롭게 연주'란 이런 지난한 연습과정 끝에 도달할 수 있다.
몇 년 전 긴 시간 무대에 오르는 아티스트들이 즐겨 찾는 간식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무용수들은 초코바와 바나나를 먹고, 클래식 연주자들은 잘 먹지 않고, 연극배우들은 간식보다 밥이 중요하다는 소소한 읽을거리였다. 취재원은 음악회는 물론 연극과 뮤지컬까지 무대에 올리는 공연장 관계자였고, 이 관계자에게 가장 예민한 아티스트는 어느 장르인지 물었다. 실은 막연히 클래식 연주자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대답은 재즈 연주자였다. 계약서의 반이 음식 관련 조항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있다고. 돌이켜보니 꽉꽉 채워둔 자신의 음악 주머니에서 어떤 것을 꺼내 들지, 어떤 것이 자신만의 음악을 나타내 줄 것인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야 무대 위에서 자유로울 테니. 자유란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다.
이토록 어려운 자유지만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르긴 하지만, 구속받는 게 싫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그렇기 때문에 재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재즈를 통해 자유의 버거움도 함께 배운다. 취미인이라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