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Dear Diary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혜이 Oct 14. 2020

연애, 결혼

2003.11.05 00:00

-휴지통 비우기는 복구가 불가능하오니, 신중하게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휴지통이었으면 좋겠어.
복구가 불가능해도 좋을 것들로 꽉 차 버렸어.
적당히 거리 두는 게 왜 좋은 건지 이제 알겠어.
겉도는 게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너랑 나랑은 우리고.
이제 우리는 없고, 너랑 나만 남았네.
지낸 시간이 얼만데 이렇게도 날 몰라줘.
내가 화내고 말하기 싫다고 하는 건 전화를 끊고 싶다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숨소리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몰라줘.
네가 너무 지독해서 무서워.
네가 너무 냉정해서 무서워.
좋아해 달라고 구걸했던 거 후회해.
 
2020.10.13 12:00
   
   좋아해 달라고 구걸까지 하다니. 대학생이 되어 두 번째로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쓴 일기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얼마든지 볼 수 있게 아니 꼭 보라고 써 놓은 일기였다. 이러면 우리가 무슨 대단한 연애를 하다가 끝난 사이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해가 지면 언제 들어올 거냐는 엄마의 전화를 나는 꼬박꼬박 받았고, 어떤 날에는 옆에 같이 있는 친구를 바꿔달라고도 하는 엄마 몰래 연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새 주고받던 문자와 전화 통화로 우리는 연애 중이었다.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나는 깊은 밤 그렇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때는 심각했겠지만 지금은 유치해서 웃음이 다 나오는 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엄마가 저녁마다 전화하는 걸 알면서 왜 새벽같이 일어나 남자 친구를 만나러 나가지 않았을까,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잖아, 왜 순순히 친구를 엄마랑 통화하게  거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한다. 연애도 좋지만 우리 가족의 사랑 방식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자연스러웠을 테니까. 무엇보다 궁금한 건 내가 어떻게 나를 좋아해 달라고 구걸했느냐는 거다. 발신번호 제한으로 전화해서 남자 친구가 받으면 끊고, 남자 친구의 친구한테 술 먹고 전화해서 남자 친구 바꿔달라고 그러고. 그러진 않았겠지, 그랬겠지.

  세월이 지나 이 친구에게는 내가 한국에서 사귄 마지막 남자 친구, 결혼하기 전에 사귄 마지막 남자 친구, 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이던 어느 날, 엄마는 유학을 권유했고 동물원에서 잠시 보호받으며 살다가 야생으로 풀려나는 동물이 된 기분으로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리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그 광활한 야생에서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연애. 물론 한국에서 군 복무 중이던 남자 친구 부대에 전화를 걸어 너는 나랑 벌써 오래전에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너랑 헤어져, 술주정을 부린 다음에 말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같이 한국으로 놀러 갔을 때, 남편과 이것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해가 떨어지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 들어올 거냐고. 그래서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고 남편에게 얘기하니까 남편이 황당해했다. 나 그동안 이렇게 살았어, 넌 우리 부모님한테 감사해야 돼,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 날 집에 늦게 들어갔다. 연애와 결혼은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여러 번 했어야 되는 건데, 같은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