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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Dear Diary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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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Oct 14. 2020

건설적인 수다

2004.05.18 00:00

   이틀 연속으로 명동에서 종로로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 눈은 빨개지고, 부끄럽게도 옷이 흘러내려 어깨도 살짝 노출했다. 눈은 아직도 좀 불편하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걸으면서, 물을 나눠 마시면서, 웃으면서, 가끔 웃긴 행동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건 즐겁다. 아- 눈이 쑤신다. 눈알을 잠시 꺼내 비눗물에 씻거나,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시 넣고 싶다-_-

   나는 고등학교에 적합한 학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입식 교육 속에서 남들에게 보여줄 만큼의 성적만 내는 ㅋㅋ 주입식 교육과 내 인생관은 잘 맞아떨어진다. 주어진 대로만 살기. 아- 근데 나는 대학교 3학년이다. 고3이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처음으로 휴학에 관한 말을 먼저 꺼냈다. 잠시뿐이었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등학교 때 사귄 남자 친구와 같이 한 그들의 미래 이야기가 사랑놀음이었다는 친구의 말이 웃기다.

2004. 5. 19 00:00   

   오늘 나눈 이야기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이야기. 결혼할 사람에게 받고 싶은 프러포즈, 너는 나의 종교야. 오늘 난 사이비 종교 건설 계획을 하나 세웠다. 상상만으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결혼할 사람에게 주어야 할 문서.

1. 난 잘 때 침을 좀 흘려요. 발 가지고 장난도 쳐요. 각방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ㅠㅠ
2. 밤에 손톱 발톱 깎는 버릇이 있어요. 시끄럽다면 놀이터에 가서 깎을게요. ㅋㅋ
3. 소파에 엎드려서 텔레비전 보는 걸 좋아해요. 그러니까 긴 소파는 언제나 내 차지가 되어야 해요.
4. 물을 많이 마셔요.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려요.
5. 머리는 매일 감아요. 샤워도 맨날 하고.
6. 외출 준비는 한 시간 좀 안되게 걸려요.
7. 자주 가보지 못한 곳에서 밥 먹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불편해요.
8. 밤에 늦게 자는 편이에요.
9. 내 일기는 당신한테 보여 줄 수 없어요. 일기 때문에 내가 싫어지면 어떡하나요.
10. 설거지는 신속하게 해낼 수 있어요.
11. 집에서는 안경을 껴요.

   다시 고등학생이 된다면 하고 싶은 일, 쇼핑몰에서 주최하는 노래대회에 나가기. 나의 외모, 사실 난 주성치보다는 이소룡을 더 닮았어. (다음엔 여자 닮은 남자로 태어나야지) Ten two와 Twelve의 차이, 뭐 네가 알아들었기만 하면 되지. 눈물의 의미, 감정의 넘침. 거짓말 못하게 하는 너의 눈물. 기뻐도 슬퍼도 숨길 수 없는 너의 감정. 동전을 넣으면 나오는 음료수처럼 감동하면 나오는 너의 눈물. 조금 덜 짤 것 같다.

2020.10.13 12:00

   이제는 더 이상 콘택트렌즈를 끼지 않는다. 멋 부릴 일이 없기도 하고, 안경을 끼면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라섹수술을 받았는데 지옥을 맛보았다며 나에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침마다 부지런히 콘택트렌즈를 끼는 것도 우리에게는 청춘의 상징이 되어버렸.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둘 다 콘택트렌즈의 세계로부터 벗어났으니.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2년 동안은 새로운 사람들 사이를 탐험하느라 서로 자주 보지 못했는데 대학교 3학년이 되고부터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사준 옷을 버리지 못해 친구가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걸 캐나다까지 챙겨 가서 즐겨 입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남자가 바로 Twelve를 모르고 Ten two라고 한 사람이다. 그런 사연이 있는 옷이라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기 좋았다. 이 옷은 말이죠, 하면서.

   결혼을 하기 전에는 내가 결혼 따위 관심조차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받고 싶은 프러포즈도 있었고 남편이 될 사람을 위한 리스트도 있었다. 그 리스트가 주로 나의 생활습관에 관한 내용인 걸 보면 내가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일기는  한국말은 잘 하지만 한글을 읽는 서툰 남자와 결혼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너는 나의 종교야, 라는 프러포즈를 받고 싶어 한 것, 목사님에게 한 때는 내가 사이비 교주를 꿈꾸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남편은 남들처럼 쉽게 웃어넘기지 못했다.  
   
   여자에게 남자 영화배우를 닮았다고 하는 게 실례일 수 있지만 그 배우가 누구인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진다. 나에게 주성치를 닮았다고 한 남자는 같은 수업을 듣던 오빠였는데 나한테 무관심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해서 내가 좋아했다. 가장 최근에 낯선 남자에게 들은 내 외모에 관한 말은, "가방인 줄 알았어요". 추운 날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내 뒷모습이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주성치나 가방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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