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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Oct 24. 2024

아는 얼굴과 고백

    교실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자리한 검은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거리며 언어 본능에는 가위바위보 같은 면이 있단 생각에 한국말로 빠져든다. 어디선가 어느 누군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게임의 시작을 큰소리로 외치면 말, 행동 아니면 의도적인 무시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즉각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자꾸 외국어의 이해는 실연한 연인의 후회처럼 뒤늦게 다가와 말문을 막히게 하는 거잖아. 자니?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과 지금의 영어 교실 풍경은 청춘과 중년의 세월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사람들은 이제 무언가 잘 못 알아듣거나 모르는 것을 스스로 조용히 손가락을 써서 순식간에 해결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려는 상황이 채 닥치기도 전에 스마트폰 화면을 서로의 눈앞에다 다정하게 들이댄다.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단어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느끼고,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점점 변해가는 복잡한 감각을 이야기하며,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을 지속하는 이다. 하지만 이건 모국어로도 겪는 일상적인 어려움이기도 해, 스마트폰과 영어를 탓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앉아 남의 말소리를 구경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요.

교실 문 앞
우크라이나 아저씨: 네 딸 태권도 하지?
나: (방금 화장실에 다녀와 씻은 손을 청바지에 문지르며) 어, 너, 나 어제 봤어?
우크라이나 아저씨: 아니, 지난주에 네가
나: 아, 맞다. 내가 너한테 손 흔들었지. 난 어제도 너 봤어. 너 아들이랑 도장밖에서 권투 했잖아.
우크라이나 아저씨: 껄껄
나: 나, 너네 애들 태권도장 처음 왔을 때 기억해.
우크라이나 아저씨: 진짜?
나: 어, 쑥스러워하는 네 아들을 네 딸이 잘 돌봐주던데. 애들은 이제 영어 정말 잘하지?
우크라이나 아저씨: 어
나: 대단하네.

    한 달 전 어느 저녁 태권도장 앞에서 아는 얼굴을 보았다. 나와 한 교실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저씨였다. 차 안에 있던 나는 그에게 들킬까 봐 운전대 아래로 고개 숙여 숨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교실에서 만났을 때 네가 모르는 걸 난 알고 있다는 우월감을 몰래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주 어느 저녁에 태권도를 마친 나의 중학생을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앞으로 걸어지나가는 그를 보자마자, 가위바위보, 즉시 손바닥을 흔들어 인사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순간 나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반가운 마음뿐으로 아는 얼굴에 제대로 반응하는 인간에 유창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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