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가드너다.
1월
날씨를 탓하며 따뜻한 실내에서 봄을 기다리는 게 상책인 달
저자 차페크 씨는 툴툴대며 1월에는 그저 기다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된다. 1월은 정원활동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달이다. 계획이 없으면 준비를 못하고, 준비가 안 되면 실행을 못한다. 그래서 1월은 가드너에게 꼭 필요하고 귀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런 1월이 참 이상했다. 한 차례 추위가 지나고 다음번 추위를 기다리는 1월은 계절적으로 겨울의 중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정쩡한 시기에 한 해가 바뀌고 새것으로 바꾼 달력의 첫 장인 1월이 시작한다. 늘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정원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왜 지금이 1월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1월이 겨울 중간에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드너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떠돌이 사냥꾼이었던 지구인들은 정착을 하면서 농사꾼, 일종의 가드너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반복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날짜'를 만들었는데, 그 시간 순환점의 시작이 지금 이 추위 한가운데이다. 얼음이 녹고 싹이 올라오는 따뜻한 봄이 아니라 겨울에 '1'이라는 숫자를 준 이유는 지금이 만물의 생장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카렐 차페크가 쓰고 요제프 차페크가 그린 『정원가의 열두달』은 <추천의 말>과 <작품 안내>로 시작한다. 문화비평가 이명석 씨는 작품안내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언제나 봄 속에 살지는 못한다. 겨울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아야 봄을 맞을 자격이 있다. 우리도 차페크 씨처럼 작은 정원에서 큰 세상을 살아갈 원리를 배워보자. 꽃과 열매, 그들을 찾아오는 나비와 이웃 친구들은 덤이다.
작게나마 정원을 가져본 적 있다고 회고하는 이명석 씨는 아마도 시간에 대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정원생활은 봄이 아닌 겨울에 시작된다. 밖에서 땅을 일구고 식물을 돌보는 봄이 시작되기 전인 겨울에도 쉴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의 정원을 가꾸는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겨울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식물리에서가 2024년 첫 책은 『정원가의 열두달』이다. 정원의 1년은 어떤 활동을 통해서 가꿔지는지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겨울을 보내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자.
하지만 미리 말을 하면,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달』에는 정원을 가꾸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정원활동을 위한 책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정원 관련 책에서는 보기 힘든 '따뜻함'이 가득 담겨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체코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인 카렐 차페크는 이 책에서 정원에서 보내는 열두 달을 매 달마다 한 편의 연극을 보듯 재미있고 찰지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와 형제인 요제프 차페크는 이 내용들을 재치 있고 매력 넘치는 그림으로 그려냈다.
비록 정원을 가꾸는 스킬이 담긴 실용서는 아니지만 작은 화분 몇 개라도 가꿔본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때로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 책으로 가볍게 정원계획을 시작했으면 한다.
또 미리 고백할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아직 식물을 키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는 과감하게 책 추천을 포기한다.
대신 뭐든 식물을 키워본 경험이 있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책이 얇지만 한 번에 완독 하는 것보다는 잡지를 보듯 조금씩 나눠서 읽는 방법을 추천한다. n회독 경험상 이 책은 식물을 키우며 흙을 살피고 물 주는 경험을 쌓아가면서 여러 번 읽어야 재미있다.
가드너라면 공감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한 우스꽝스러운 일들과 푸념들, 솔직한 마음들이 담겨 있고 그 문장들마다 킥킥대며 책을 폈다가 덮었다 반복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차페크 씨의 열두 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원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가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슬그머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아쉬울 분들을 위해 또 하나의 책『정원생활자의 열두 달』(오경아 지음)을 소개한다. 제목이 비슷하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길 바란다.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을 통한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늘 누군가의 간접 경험이 절실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가든디자이너 오경아 작가의『정원생활자의 열두 달』을 추천한다.
오랜 방송작가 생활을 정리하고 외국에서 조경공부를 한 후 현재 강원도에서 '오경아정원스쿨(오가든스)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방송작가 생활만큼이나 가든 디자이너로서 경험이 쌓인 작가가 그동안의 노하우를 가득 담아 정원생활의 열두 달을 소개한다.
1월부터 12월까지 어떤 계획으로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지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가득 담겨있다. 올해만큼은 제대로 '나만의 정원'을 가꿔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책제목에 유의하자).
이 책은 처음 읽을 때는 훑어보기 완독을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체크해 두고, 두 번째부터는 '월리를 찾아라'를 읽듯 꼼꼼하게 읽어나가면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그렇게 책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 켠에 '나만의 정원' 한 평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번 책추천도 분량조절에 실패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차페크 형제가 정원에서 보낸 열두 달 중 먼저 소개한 1월을 뺀 나머지 달들을 간단하게 공유해보려고 한다.
너무 길다 싶으면 차페크의 책을 읽듯 천천히 원하는 달만 골라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글 가장 마지막에 공유한 차페크 씨의 당부만큼은 꼭, 꼭! 지금 읽길 바란다.
2월
1월의 연장선이라고 하지만 1월과는 확연히 다른 분주함이 있다. 땅을 준비하는 시기이자 가을에 심어둔 구근에서 올라오는 싹과 이른 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리고 3월이 곧이다.
3월
차페크 씨의 문장들이 춤추기 시작한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추위가 있지만 가드너는 몸이 달아오른다. 잎과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카렐 차페크는 이 기쁨들을 행진곡에 비유했다. 감정이 문장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 있어 읽는 사람도 덩달아 신이 나기 시작한다.
4월
드디어 4월이다.
끊임없이 사들이는 묘목과 모종으로 가드너의 통장은 '텅장'이 되어가지만 반대로 정원의 땅은 더 이상 호미를 들이댈 자리가 없이 꽉 차 간다.
5월
땅과 식물의 목마름을 가셔 줄 가디라던 비가 시작된다.
p.101
굵직한 빗줄기가 포장도로 위를 때리고, 땅이 막혔던 숨통을 틔우는 소리가 들린다.
빗물이 콸콸 흘러내리며 천장을 울리고 창문을 흔들어댄다.
수천 개의 손가락이 빗물 홈통을 건드리고,
도랑을 찰방찰방 달려 내려가 물웅덩이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누군가는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누군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머리를 식힌다.
휘파람을 불고 고함을 지른다.
맨발로 길가에 흐르는 누런 흙탕물 속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친다.
묘사가 너무 시원했다. 이렇게 기뻐하는 게 사람일 수 도 식물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문장들이 이렇게 찰질까?
신문 연재로 시작된 이 글들은 1929년에 책으로 출판되었기에 곧 100년이 되어간다. 오래된 것뿐 아니라 너무나 생소한 문화권의 체코의 정원생활을 이렇게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니! 책을 읽는 내내 번역이 정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옮긴이 배경린 씨도 식물생활을 사랑하고 가드너 기질이 다분한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어로 쓰인 이 문장들을 이렇게 감칠맛 나게 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6월
끊임없이 풀을 베는 달이다.
계획에 없던 종류의 풀들(a.k.a. 잡초)과 생각보다 무성하게 자라버린 풀들을 골라줘야 한다.
싱그러운 봄비와 잔뜩 상기된 기온으로 뭐든 쑥쑥 자라는 시기이니 가드너는 할 일이 부쩍 많아진다.
하지만 종일 몸을 움직여 해 질 무렵 허리를 겨우 펴지만, 하루종일 한 게 없어 보이는 그런 달이다.
7월
장미를 접목하는 달, 그리고 흙을 갈아엎고 물 걱정 하는 달이다.
바짝 말라가는 땅에 아침, 저녁으로 물을 충분히 줘야 하는 여름이다.
7월과 8월 사이의 p.126 <식물학 챕터>라는 꼭지의 글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재밌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을 학문적 구분이 아닌 장소별로 식물군을 나누었다.
8월
친구에게 정원을 맡기고 휴가를 떠나는 달이다.
하지만 휴가지에서도 식물만 보이고 매일매일 두고 온 정원이 걱정된다. 그리고 정원을 맡은 친구는 친구대로 고역을 치른다.
생각해 보니, 정원은 반려동물인 강아지와 비슷한 존재이다.
'자연이니 알아서 크겠지'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정원은 뒷산과 다르다. 끊임없이 손길이 필요한 존재다.
9월
국화, 가을꽃이 가득한 달이다.
p.152
이제 더는 부인할 수 없다. 가을이다.
국화꽃이 피기 시작하면 절로 인정하게 된다.
국화를 비롯한 가을꽃들은 남다른 활력과 풍성함이 있다.
그리 요란스럽지 않고 저마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어찌나 한가득 무리 지어 피는지!
완숙한 가을에 피는 꽃들은 쉼 없이 피고 지는 청춘의 봄꽃들에 비해
훨씬 힘 있고 열정적이다.
어른스러운 분별력과 견실함이 있다.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정신없이 정원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1년의 3/4가 지나가버렸다.
늘 그렇듯 시간이 빠름을 체감하게 되는 시기이다.
10월
4월과 닮은 달이다.
차페크 씨는 이것저것 아직 심기 좋은 달이라고 해서 10월의 체코날씨가 궁금해졌다.
식물식재에 있어서 밖에서 제 힘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월동여부'가 굉장히 중요하다.
바로 옆 나라 일본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도쿄만 해도 대체로 한국보다 따뜻한 겨울이다. 그래서 겨울 일본여행을 하면 언제나 부럽다. 일본 길거리의 담벼락을 따라 늘어선 화분 속, 작은 화단의 식물들이 유난히 초록으로 보인다.
11월
흙을 위한 달. 흙을 갈아엎고 일구는 달이다.
책을 읽으면 차페크 씨가 얼마나 흙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진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었다는 신뢰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고 비싼 나무를 가져다줘도 흙이 좋지 않으면 나무는 살 수가 없다. 내가 나무의사 공부를 하게 된 계기도 '흙'을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잠자리가 좋아하 하루가 좋다는 광고도 있듯이 흙은 식물의 잠자리와 같다. 더불어 필요한 무기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흙이 좋아야 식물도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다.
12월
정신없었던 한 해가 끝나간다.
p.187-188
그렇다.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났다.
...
이제 정원이 눈밭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정원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 하나를 기억해 낸다.
바로 정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독자들은 일찌감치 눈치챘겠지만,
정원가는 그간 어찌나 바빴는지 도통 정원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이 문장을 읽고 너무 웃겼다. 가드너의 삶이란!
그런데 이 일상이 나의 일상과 닮지 않았나?!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해서 어찌어찌하다 보면 귀가 시간이다. 그리고 씻고 저녁을 먹으면 또 금방 자야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 한 달을 보내면 벌써 연말이 되어버린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다.
씨앗을 심고 열매나 꽃을 위해 열심히 가꾼다.
끊임없이 나를 성장시켜 가는 일이다.
그래서 카렐 차페크는 우리 모두에게 당부한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카렐 차페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