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좋아합니다.
식물리에 아뜰리에를 운영하면서 손님들에게 식물 추천을 해왔다. 단순히 내 마음대로의 추천은 아니고, 그들에 삶의 방식에 맞춰 나름 현실적인 솔직한 추천을 했다.
한 가지 추천 중 하나는 꼭 살아있는 초록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거주 환경이나 생활 패턴상 살아있는 식물을 키우기 어려운 손님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는 식물이 그려진 그림이나 식물 내용이 담긴 책 등을 주로 권하였다.
그리고 그 추천의 연장선으로 식물리에 서가를 꿈꾸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시작할 가게에서 당연히 식물 추천을 할 텐데,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더 꼭 맞는 더 적절한 '초록'을 준비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작은 책방을 겸한 식물 편집샵을 하기 위해, 그 시작을 온라인 책리뷰로 하고 있는 셈이다.
생각보다 식물이나 생태를 주제로 한 책은 많다. 전문 지식을 전달하는 책도 있지만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소설과 에세이도 있다. 그래서 책을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우연히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용뿐 아니라 책의 표지가 초록으로 덮인 책들도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책들은 대부분 내가 준비하는 식물리에 서가와 크게 동떨어진 주제의 책도 아니었다.
그래서 식물을 의미하는 '초록'에서 은유를 잠시 내려두고, '초록색'에 집중하여 책을 선정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책장에 주르륵 꽂혀있는 다양한 색상의 초록들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종종 책 표지가 초록색인 이유만으로도 책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으로 화가 김혜림이 쓰고 그린 『산책 좋아하세요?』를 소개한다.
산책 좋아하세요?
p.14
지금도 나의 팔레트 안 초록 자리는 늘 깊게 파여 바닥이 보인다.
초록 계열의 색연필, 크레파스는 대부분 사용감이 많거나 부러졌거나 몽땅몽땅하다.
...
나는 갈수록 초록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짙은 그 색과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p.65
삶이 버거운 날이면 초록에 기댄다.
손을 내놓고 걷기조차 힘들 만큼 차가웠던 그날에도 무작정 길을 나서 초록을 찾았다.
그리는 직업을 가진 저자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동생 가족과 엄마와 함께 제주살이를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그림가게를 운영한다.
p.38
그림으로 돈을 버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그래도 마음에 찾아온 고요가 즐겁다.
처음에는 미련하게 일했지만 지금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속도 조절이 필수다.
시간이 흐르며 그림이 쌓여 간다.
이제 나는 제대로 숨 쉬며 두 번째 꿈 안에서 살고 있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꽤 팍팍한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이 쉽지 않은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숨이 막히거나 뱃속이 녹아내리는 감정을 어쩌다가, 자주, 그러다가 매일 느끼게 되면 말이다.
견디지 못하는 일을 내려두고 좋아하는 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와 내가 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얼추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초록 곁에서 고양이와 같이 잠을 청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상.
일종에 '결'이 맞는 작가의 책은 밑줄을 그으며 읽을 수가 없다.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책 대부분에 긋게 되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면 '나와 결이 맞다'라고 생각한 그 순간 책을 덮고 바로 책을 주문한다.
그래야 마음 맞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은 나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참 차분하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한 문장 한 문장씩 읊어주는 느낌이다. 불필요한 수식은 거의 없고 문장에 담고 싶은 마음만 담겨있다. 간결한 문장 덕인지 책은 물리적으로 얇다.
하지만 어느 책 보다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많아 내게는 꽤 묵직한 책에 속한다.
p.24
나에게 걷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
각자의 방향으로 각자의 시간을 걷는 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고, 알 이유도 없다.
나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펼쳐지는 풍경을 온전히 눈에 담고 걷는다면 그 걸음걸음에 작은 위로가 넘치게 묻어난다.
p.120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관계에서 발생하고 고독은 내 안에서 형성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고독 안에 자기만의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
...
내 안의 모든 감정 앞에 깨어 있고 싶다.
문장의 간결함으로 인해 어쩌면 무미건조할 수도 있는 이 책이 반짝이는 것은 풍경이나 시간에 대한 묘사 덕이다. 저자의 직업이 화가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풍경을 보러 제주에 가고 싶어 진다.
p.85
볕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빛을 뿜어내고 있다.
진한 주황빛으로 곱게 물든 세상이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시간이다.
나는 하던 일을 제쳐 두고 밖으로 나간다.
하루 중 가장 황홀한 빛깔을 맞이하기 위해 산책길로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p.139
다시 봄이었다.
노란 볕이 싱그럽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계절.
새로 돋아난 잎의 살랑거리는 춤사위가 경쾌했다.
나는 숲을 찾았다.
붉은 토양 위로 쏟아지는 빛내림을 눈에 담으며 점차 짙어지는 녹음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책에 담긴 저자가 겪은 슬픈 경험들은 우리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게 언제인지에 따라서 어떻게 갑자기 찾아오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슬픔과 그로 인한 아픔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 갑자기 이르게 찾아온 슬픔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 그런 무게를 버텨내면서도 저자가 이렇게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아마도 가족과 산책, 그리고 역시 초록이 아닐까 싶다.
p.182
초록 안에서 행복한 엄마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기쁘다.
식물을 귀하게 여기게 된 나의 태도가 반갑다.
엄마의 작은 정원에서 온 가족이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오랜만에 나와 교집합이 많은 작가의 책을 읽었더니 마음이 아주 풍족해졌다.
산책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저자의 문장들과 함께 제주의 바다와 숲, 그리고 때로는 서울의 한강변을 걷다 보면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조금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다른 계절보다 겨울에, 특히 연말에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p.140
아무튼, 언제든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기쁨이다.
내가 선택한 삶의 모양에서 특별히 좋은 점 중 하나다.
나는 이제 내 앞에 놓인 여러 갈래의 길을 두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스스로 믿기만 한다면 어떤 길도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걸었을 나를 멋대로 상상하고 쓸데없이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길을 내 속도대로 걷는다.
아니다 싶으면 되돌아가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
걷는다, 산책한다, 앞으로 나아간다. 초록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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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림 작가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imdraw.bree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