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지구를 구할 그린테크놀로지, 솔라리타가 선도합니다.
2050년대 솔라리타 회사는 기후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희망을 걸고 있는 기술인 '그린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한다. 그중에는 나노입자들을 이용해 유기물을 친환경적 단위 물질로 바꾸는 실험도 있었는데, 2055년 가을, 어떠한 오류로 이 극도로 소형화된 입자가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자가 증식을 하는 이 작은 입자는 급증하여 곧 지구 전체로 뻗어나가 대기를 잠식하고 땅을 황폐화시킨다.
인류는 이 작은 먼지를 '더스트'라 이름 지었고, 더스트가 지구에 덮여버린 사건을 '더스트폴'이라 한다.
소설은 두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다. 더스트폴이 일어 난 직후인 2055년부터 2059년까지의 이야기와 인류가 더스트폴을 이겨내고 재건을 이룬 60년 뒤인 2129년의 이야기이다.
2129년 더스트생태연구센터의 '아영'은 생태학자로 이제는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가는 더스트 시대의 생태를 연구하고 있다.
어느 날 폐허가 된 도시인 '해월'에 모스바나 이상증식 현상이 나타나며 센터로 분석 의뢰가 오게 된다. 확인차 직접 방문한 현장에서 담당자에게 특이한 소문을 듣게 된다.
바로 이상증식한 모스바나 덤불에서 파란색의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소문이다.
함께 나간 선배와 담당자는 그 소문을 가볍게 넘기지만 아영은 그럴 수가 없다.
어릴 적 보았던 신비했던 광경이 떠오르며, 아영은 모스바나의 이상증식 현상,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2056년부터 2059년까지는 더스트폴이 일어난 후 자매인 '아마라와 나오미'가 '프림빌리지'라는 곳을 찾아가는 과정과 그곳에서의 이야기이다.
프림빌리지에는 '지수'라는 리더와 마을이 운영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온실 속 식물학자 '레이첼'이 있다. 이곳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북서쪽의 국립공원 지역으로 더스트폴 이전에는 산림연구소와 마을이 있던 곳이다. 더스트가 온 지구를 덮었지만 여기, 프림빌리지는 축복받은 숲이 있어서 작물 재배가 되고 이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더스트폴이 종식되기 이전인 2059년에 끝나는 이유는 그 당시 다른 공동체와 같이 사람들 간의 분열과 외부 침입으로 마을이 파괴되었고, 구성원들은 지수가 전달해 준 식물꾸러미를 들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70년이나 떨어진 이 두 시간은 '모스바나'라는 식물을 통해 연결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을 직접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하게 생략한다.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식물, 식물을 다루는 일에 대한 묘사와 표현이 아주 자세하고 섬세하다. 책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현재 실재하지 않는 것들도 많은데 책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하다 보니 전혀 낯설지 않다. 책을 읽는 내내 각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마 책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모스바나(일반명)
학명 : Hedera trifidus
송악속의 상록성 덩굴식물
흔히 키우는 관상용 담쟁이의 근연종으로, 외국에서는 악마의 식물로 불리기도 함
다른 식물들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로 강한 침투성 식물이며 독성이 있어 피부염이나 알레르기를 유발함
식물의 모든 부위가 사람에게 위험하며 특히 잎과 열매는 더 강한 독성을 지님
소설 속 가상의 식물인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지구를 뒤덮었던 우점종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모스바나 덩굴로 가득했다. 그러나 곧 도시와 국가가 재건되며 모스바나는 사라졌고 다른 식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스바나가 보여주는 식물의 특성은 참 경이로웠고, 다양한 생물학적 이론을 뒷받침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 책을 쓴 '김초엽'작가는 포항공대에서 학서, 석사를 이수하고 2018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소설로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SF소설인 과학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한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과학소설'이란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펼쳐가는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단순 상상력만으로 쓴 판타지 소설과는 다르게 과학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한 소설을 통해 과학적 경이감을 더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인터뷰를 보니 왜 저자의 책들이 몰입감이 뛰어난지 이해가 되었다. 전공 지식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을 소설의 내용을 풀어가는데 이용하는 작가관이 책 속의 장면들을 더 섬세하고 현실감 있게 표현하여 생생한 장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책은 아영이 밝혀낸 사실들로 과거 더스트폴의 종식에 대한 새로운 결론이 제기되고 모스바나에 대한 재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결말을 읽으니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인간은 그저 지구라는 행성의 긴 역사에 잠시 다녀가는 일부라고 느꼈다. 이 행성의 주인은 자연이고, 그중 특히 식물이 행성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하고 일궈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이 땅을 일구고 열매나 잎으로 동물들의 먹이를 제공하고 그들을 숨 쉬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p.365
식물 인지 편향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오래된 습성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식물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책을 읽는데 문득 김초엽 작가의 이름이 다시 보였다.
어떤 한자를 쓰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름의 두 글자 모두가 식물이다.
풀과 잎.
'작가의 말'에 의하면 김초엽 작가의 아빠는 원예학 전공이라고 한다. 인간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오는 식물의 '힘'을 아빠는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유연하지만 가장 강력한 생물의 이름을 딸에게 지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더스트폴이 시작되는 시기는 2055년이다.
작가의 마음대로 설정한 시기이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2023년과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변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서, 2055년에 지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몹시 걱정이 된다.
부디 '더스트폴'과 같은 인간의 실수로 인한 재해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