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2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길거리에 널브러진 따릉이를 정리하는 이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사소한 방법들에 관하여

by AND ONE Feb 23. 2025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 中)

서울시의 공공자전거 서비스 따릉이가 출시된 이후로 거리에는 여러 회사에서 운영하는 자전거와 킥보드가 널브러져 있습니다. 부러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성이 말입니다. 입 밖으로 "쯧쯧" 거리는 순간이 하루에 한 번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예상치 못한 아니, 어쩌면 예상 가능한 무질서한 자전거와 킥보드의 거치 행렬에 왜 내가 항상 짜증을 내는 것인지... 그 이후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순간에 나는 넘어진 자전거를, 인도 한복판에 세워진 킥보드를 양손에 들고 가지런히 놓습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가로수 근처에 놓아야 한다는 것. 바람이 부는 경우, 도로 안쪽으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가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이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가 눈에 보이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제 갈길을 가고,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제 나름의 이유는 것이겠죠.


어느덧 길거리의 따릉이를 정리한 지도 3년 차입니다. 그동안 스스로에게 변한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마음먹지 않는 한 그 무엇도 필자를 짜증 나고 화나게 만드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해졌습니다.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구석진 곳에 가지런히 놓을 때 필자는 자전거를 타며 맞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산뜻한 감정을 느낍니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인간다움을 회복합니다.


결국 어떤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일상의 중심을 내게로 옮겨놓는다는 뜻입니다.  태도 선택의 기준은 오직 '인간다움'에 있습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것이며, 궁극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타인을 위한 행동이 알고 보니 나를 위한 행동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우리는 자유롭고 인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답게 사는 일이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과 동의어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답게 사는 일이 나를 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게는 '인간다운'일이 타인에게는 정반대로 '비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중 하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인간다움의 가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자 필자는 2월 동안 '독일 나치의 집권과 홀로코스트' 전후의 여러 이야기들을 찾아봤습니다. '비인간성의 시대' 였던 그때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한다면, 일정한 운율을 갖고 반복되는 지금의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에서 대중의 위험성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그리고 브루탈리스트로 이어지는 시대의 참상과 상황에 따라 서로에게 잔혹질 수 있는 일상성, 집단과 군중의 폭력성을 글과 영화로 마주하는 일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저만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 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 결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일하는 현장에서도 내 스스로 인간다움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될 수 있는 되게 만드는 일'이 일터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난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될 수 있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식과 기술과 자본의 한계가 아니라, 관습의 이유로, 정무적인 판단으로, 실무자가 귀찮기 때문에, 노조와의 관계가 복잡하기에, 귀찮은 문제를 만들기 싫기 때문에 하던 대로 하게 되어 되지 않는 일을 많이 겪기도 합니다. 일터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일하는 것이 혼자만 모난 돌처럼 외골수처럼 보일 수 있기에 위험해 보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터에서 인간답게 일하지 못했다고 느낀 날에는 평소보다 더 따릉이 정리를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 저는 오직 제 자신을 위해 일터에서 길거리에서 제 나름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대중'으로 불리며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인간의 우매함과 예의없음에 익숙해져버릴수록  우리는 100년 전 스페인의 한 철학자가 예견한 것처럼 야만의 시대에 살게 될까봐 가끔은 두렵기도 합니다.

인간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교양 없는 야만인이 된다. 야만은 해체를 지향한다.
그래서 야만 시대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작은 집단끼리 서로 적대시하는 시대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대중의 반역

야만의 시대, 여러분들은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키고 계시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월요일 아침이 존재하는 이유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