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점을 찍는 1시간, 점심 혼자 먹는 남자 (14)
나에게 주어진 마음에 점찍는 시간, 점심 한 시간. 자고로 "점심"의 "점"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으로, 허기가 져서 집중력이 떨어질 때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마음에 불이 반짝 붙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것을 의미한단다.
노년의 비극은 아직 젊다는 데 있다.
(오스카 와일드)
오늘도 하루만큼 늙는 중. 늙은이가 젊음을 탐할수록 젊음은 죽어간단다. 20-30대처럼 보이는 놈들은 공부는 안 하고 지하 식당에 앉아 한 시간째 이야기 중이다. 말의 반은 욕이고 반은 남 탓인 것 같다. 한때는 최루탄 날리면서 민주화를 이룬 우리 운동권 세대. 하지만 어느덧 이들도, 나도 60대가 되었다. [586]에서 [686]으로의 전환. [686]은 앞뒤가 똑같아 뭔가 말장난 같다. 우리 세대의 대표 주자인 유시민이 60대면 뇌가 굳는다고 했지만, 아직 나의 뇌는 말랑하다. 다만 회사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전 나는 은퇴했다.
노화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요즘 인기인 <저속 노화> 콘텐츠를 찾아본다. 그럴수록 깨닫는 한 가지. '노년의 비극은 아직 젊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제야 내 인생의 본 궤도에 진입한 듯한데 사회는 벌써 나를 밀어낸다. 몇몇 친구들은 자연인이 되고 싶다며 내려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수도권 근처의 농막을 하나씩 구입하여 '별장'에 놀러 오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본디 서울 사람인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서울, 이곳이 내 집이다. 헌데, 낯설다. 집에 하루 종일 있는 게 편치 않다. 도서관을 다닌 지도 벌써 몇 달째. 아직 혼자 밥 먹는 게 편치 않다. 공공 일자리 사업과 경비원 자리는 연줄이 필요한 것인지 서류 탈락 문자만 받는다. 오늘도 나와의 채팅방에서만 대화창이 쌓이는 중. "서류 탈락"의 충격이 이렇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줄 알았다면, 방구석에 있는 아들놈에게 살갑게 대해줄걸. 자식이라고는 아들놈 하나밖에 없는데, 몇 년째 취업 준비 상태다.
처음에는 아비가 대기업을 다니는데, 서류 탈락이나 하는 꼬라지가 영 탐탁지 않았다. 뭐라도 시켜야 되겠다 싶어서 취업 컨설팅을 받게 했지만 결과는 불합격. 노가다든 뭐든 하고 살라며 등 떠밀고 싶지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나 역시 나이 60이 될 때까지 몸 쓰는 일은 해본 적 없다. 함바그집이 아니라 함바집을 간다는 건 인생 계획에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럴 때는 종이 신문이 최고다. 믹스 커피 한 잔을 왼쪽에 두고 종이를 펼쳐 넘기는 감각. 정치와 경제를 논하고 세상을 고민했던 호시절이 떠오르다가 문득 보이는 기사 하나.
성별로는 남성 고독사가 여성 고독사보다 많아 남성이 상대적으로 고독사에 취약했다. 2023년 성별 미상자(29명)를 제외한 고독사 사망자 3,632명 중 남성은 84.1%(3,053명), 여성은 15.9%(579명)로 남성이 여성보다 5배 이상 많았다. 연령대별로는 60대(1,146명)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50대(1,097명), 40대(502명), 70대(470명) 순이었으며, 그 가운데 50·60대 남성이 고독사 위험에 특히 취약했다(53.9%). <보건복지부,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실태조사 결과 발표 中>
갑작스러운 은퇴는 아니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60대에 은퇴를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직장, 자연 이직률 0%에 수렴하는 자동차 회사의 최고 계열사에서 30년을 근무했다. 모아둔 돈도 꽤 있고, 서울에 자가도 있고, 국회의원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국민연금도 걱정 없다. 근데 없는 게 있다. '점심 같이 먹을 친구'. 은퇴 전부터 와이프에게 약속했던 한 가지. "나, 다른 은퇴하는 친구들처럼 '삼식이'는 되지 않을게". 왜 그랬을까. 30년 이상의 삶을 직장과 가정에 헌신하며 돈 벌어오고, 가정에도 충실했을 뿐인데, 밥 얻어먹는 게 그렇게도 욕먹을 짓인가 싶다. 가만 보면 요즘 세상은 남자에게 너무 불합리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누구인가'를 해결하고
'나는 무엇일 수 있는가'로
넘어가야 하는 때가 온다.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해도 되는가?
-파스칼 뷔르네르크-
내년이면 환갑.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답하지 못했다. 가장과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순간, 매일 점심, 나의 정체를 의심한다. 아침과 저녁에는 그럴 수 없다. 여전히 강인하고 듬직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야 하니까. 책임질 게 있는 사람에겐 고기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 걸까? 또래처럼 보이는 식당 아줌마는 묻지도 않고 제육볶음을 가득 담는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제육볶음을 맛있게 먹는 것부터 시작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