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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Feb 18. 2021

로컬 카페의 배신

홍콩 몽콕 차이나 카페

2016년 2월, 설 연휴를 맞이해 남은 휴가를 하루 정도 불여서 홍콩에 갔다. 2박 3일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어느덧 한국으로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내 손에는 <론리 플래닛>이 들려있었다.


<론리 플래닛 홍콩>에는 워킹 투어 섹션으로, ‘야우마테이, 침사추이 산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침사추이 산책’을 따라가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옛 건물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나는 오스틴 로드까지 걸어갔다. 론리 플래닛 지도를 동원하여 팍온 빌딩이며, 탁싱 가, 카니발 맨션을 찾았지만 단체로 타임 슬립 한 것인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건물들은 철거되었는데 책 개정을 하지 않은 건지, 내가 길눈이 어두워 발견을 못하는 건지, 그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깜깜했다. 집요하게 찾으려면 불빛도 어둡고 인적이 드문 좁은 길 등을 지나야 하는데, 그 길로 가게 되면 난 영영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한 '계획에 없는 여정'이 여행의 묘미이며 숙명이 아니겠는가. ‘침사추이 옛 건물 산책’은 즉시 취소되었다. 그냥 넓고 안전한 네이선 로드로 돌아가, 대로를 따라 야우마테이 역까지 걸어가 정통 차찬텡인 미도 카페에서 프렌치토스트와 홍콩식 밀크티인 나이차를 마시기로 했다.

이왕 걸어가는 거 야시장도 구경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던에서 야우마테이까지 가는 구간은 네이던 로드가 아닌,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을 거쳐서 가기로 했다.


템플 스트리트는 남북으로 꽤 길었다. 동대문 시장 같았다. 짝퉁 시장, 조악한 액세서리 가게, 음반 혹은 DVD 가게, 장난감 가게, 옷가게 등 전형적인 야시장 상점들이 즐비했다. 살까 말까 망설였던 건 음식 모형 자석이 유일했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결국 사지 않았다.

비슷한 가게들이 너무 많아서 10m 앞에서 본 물건이 또 등장했다. 복붙복 같은 느낌의 장대한 시장이었다.

내가 야시장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이 시장이 별로인 건지,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은 침사추이 최대의 야시장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꽤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손해 볼 건 없었다.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의 다이파이동

시장길 중간중간에 길거리 음식을 파는 다이 파이동이 꽤 있었다. 예전에 동대문 시장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잔치국수가 생각났다. 딱 그런 분위기의 음식점이었다.

어느새 템플 스트리트는 끝났고, 네이선 로드로 접어들었다. 네이선 로드에서는 지도도 필요 없었다. 곧게 뻗은 넓은 대로였다.

네이선 로드에서 건강식품을 광고하는 삼합회 전문배우 증지위 선생님

야우마테이 부근은 네이선 로드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 길 찾기 난이도가 높아져, 구글맵을 구동해 미도 카페를 찾아 나섰다.

미도 카페가 문을 닫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설 연휴를 앞두고 사장님이 휴가에 들어가셨다.

반대편에서 바라본 문 닫힌 미도 카페

저녁 식사가 무산된 것도 문제지만, 홍콩에서 차찬텡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당시 나는 차찬텡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8시쯤 숙소를 나와 몽콕 역으로 향했다. 전날 저녁 미도 카페가 문을 닫는 바람에 차찬텡에 가보지 못했으나, 정말 차찬텡이 궁금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론리 플래닛>에 또 다른 차찬텡으로 소개된 차이나 카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차이나 카페를 가려면 몽콕 역 A2 출구로 나와 파이프 로드와 캔톤 로드가 나오는 교차점까지 걸어야 했다. 지도를 보며 캔톤 로드에 도착했는데, 여기가 캔톤 로드가 맞는지 내 눈을 의심했다.

캔톤 로드는 이스트 침사추이에 위치한 호화스러운 명품거리로, 1997년 영화 <첨밀밀>에서 여명과 장만옥이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을 함께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거리이다.

몽콕 근방 캔톤 로드는 명품거리가 아닌 시장이다

하버 시티, 1881 헤리티지, 마르코 폴로 호텔이 있는 화려한 거리인데, 몽콕의 캔톤 로드는 평범한 아침 시장이다. 시장이 있고 서민적인 풍경의 북쪽의 캔톤 로드가 남쪽에 이르러 명품거리로 변하는 모습은, 캔톤 로드가 길이 아닌 한 줄기의 강물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이 몽콕의 '아침 시장'이 캔톤 로드의 상류(上流)라고 생각했다.

쉽게 찾을 수 없는 차이나 카페 입구

어렵게 차이나 카페를 찾았다. 가게가 허름한 데다가, 간판이 영어가 아니라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다행히 <론리 플래닛>의 ‘차이나 카페’ 설명 옆에 한자명이 함께 적혀있어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차이나 카페에 관광객은 나 혼자로, 모두 현지인이다.

복고풍의 타일이 벽면을 가득 채운 예스러운 카페였다. 카페라고 부르기엔, 오래된 분식점처럼 보였다.

홍콩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외식을 한다더니, 일요일 아침부터 현지인들은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방 쪽에서 할아버지 사장님이 걸어 나오셨다.

나는 밀크티와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러 왔는데, 현지인 중에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크티 한 잔만 마시거나, 대개 완탕면으로 추정되는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프렌치토스트'는 관광객용 메뉴인 걸까 생각했다.

메뉴판과 조미료통

가장 아늑해 보이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한편에 메뉴판이 있는데 온통 한자였다. 밀크티는 눈치껏 찾을 수 있었지만, 프렌치토스트를 메뉴에서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 메뉴

다행히 사장님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영어 메뉴판을 가져다주셨다. 의외로 메뉴가 다양했다. 스파게티도 있으며, 샌드위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음식들을 먹는 건 실험적일 것 같았다.

음식을 기다리며, 현지인들이 아침 식사하는 차찬텡 풍경을 담았다.

협소한 1층이 어느새 거의 다 찼다.

홍콩식 밀크티

상대적으로 조리가 덜 필요한 밀크티부터 나왔다. 색깔은 오묘하게 이뻤고, 젖소가 그려진 컵도 앙증맞았다. 그러나 맛이 없었다. 당도 0%의 밀크티였다.

실크 밀크티라는 별칭 때문에 호기심이 드는, '란퐁위엔'의 밀크티를 제외하고는 홍콩에서 밀크티를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렌치 토스트를 위한 올리고당은 CJ제품이었다

프렌치토스트와 함께, 그 위에 뿌려먹을 수 있는 올리고당을 제공하는데, CJ 제품이라 괜스레 반가워졌다.

기름이 니글거리는 프렌치 토스트와 당도 0%의 밀크티

프렌치토스트의 빛깔을 보고 놀랐다. 갈색에 가까웠다. 역시 외양만큼 니글니글하고 느끼했다. 저 토스트 위에 올라간 버터 한 조각이 가장 맛있었다.

그런데 니글니글하면서, 달콤하지는 않고 퍽퍽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올리고당이라도 좀 뿌려볼까 했는데, 뚜껑이 절대 안 열렸다. 결국 올리고당은 뿌리지 못했다.

그래도 프렌치토스트는 어떻게든 3/4 정도 먹었는데, 저 밀크티는 거의 다 남긴 것 같다. 당도는 0이면서 우유는 약간 비린 맛이 났다.


이 모든 것의 가격은 33 HKD(한화로 약 4,700원) 정도로 저렴했다.

젖소 컵과 제휴를 맺은 듯하다

소원대로 홍콩 차찬텡을 경험할 수 있었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80년대의 홍콩으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복고풍 매력이 넘치는 카페였다. 젖소 머그컵도 귀여웠다. 물론 그 안에 든 밀크티는 최악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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