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도쿄
나의 첫 도쿄 여행은 긴자 바 투어였다.
다자이 오사무 등 옛 문인들의 단골집이었다는 오래된 바에서 여행이 시작됐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나무 바에 앉아 소곤소곤 얘기하는 장면. 마치 검은 기모노가 사각사각 소리를 낼 것 같은 그 이국적인 장면에 이끌려 친구 D와 만장일치로 도쿄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는 겸 주변의 다른 바에도 방문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곳 때문에 도쿄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2016년 9월 2일 금요일
출발 전날, 여행지에서 태풍을 만날까 봐 걱정했다. 어머니는 "비행기가 못 뜨면 어떡하니?"라고 하셨다. 검색해보니 태풍 10호는 이미 지나갔고 12호는 일본 남부지방에 있어서 도쿄는 사정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기예보엔 우산 그림이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날 저녁 6시부터 새벽 내내 오는 비였다. 여느 때라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시간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메인은 긴자 바 투어로, 진정한 일정은 저녁 6시부터 시작된다. 안타깝지만 우산을 들고 여행하게 될 운명이었다. 나는 우산을 캐리어에 넣었다.
2016년 9월 3일 토요일,
인천 중구 운서동
막상 다음날이 되자, 인천의 하늘은 맑았다. 비행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향했다.
이번 좌석은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활주로가 스쳐 지나가고, 곧 바다가 나왔다. 하얀 물살을 가르는 선박들과 잔물결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거리가 멀어서인지 배도 그곳에 멈춰있는 것처럼, 물결도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진처럼.
곧 엄청난 길이의 인천대교가 보였다. 눈어림으로 다리의 마디마디를 세어 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샹들리에 같은 현수교가 나타났다.
다리를 보고 감탄하려던 찰나, 온통 하얀 구름으로 암전 됐다. 만약 이것이 영화의 장면이라면, 비행기가 구름을 뚫어 온통 하얀 안개에 휩싸이는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것이다.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비행기를 꽤 많이 타봤고, 이륙도, 구름도 모두 익숙할 만큼 접했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정적인 순간은 처음이었다. 나 혼자만 잠시 세상에 놓인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고 온기를 충만하게 느낀 경험이었다.
비행기는 구름 층을 뚫고 성층권에 도달했다. 그동안 한 번도 발 밑의 구름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날 처음으로 구름에도 산맥이 있고, 봉우리가 있고, 골짜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구름이 끊임없이 내달리는 지평선 가운데, 마치 백록담 같은 모양의 호수를 보았다.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일본 동쪽 나리타에 도착했다. 구름이 아닌, 진짜 산맥과 바다가 탑승객들을 맞이했다.
도쿄 주오구 야에스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태풍은 없었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도쿄역 코인라커에 맡기고 D가 미리 조사한 맛집으로 향했다. 야에스에 있는 ‘모토무라 규카츠’라는 식당이었다.
원래 계획은 점심을 먹은 후, 교바시에 있는 브릿지스톤 미술관에서 상설전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긴 대기줄 때문에 미술관 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30분 정도 줄을 서겠거니 생각했으나, 결국 두 시간이나 기다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도 여행 일정은 줄곧 바 투어를 하며 술을 마셨으니 결국 먹는 것에서 시작해 마시는 여행으로 끝난 셈이다.
우리는 진정한 미식가(미식가라면 오랜 줄을 기다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와 애주가(애주가라면 하루에 바를 서너 군데 도는 것은 기본이다)의 그램드 슬램을 달성했다.
도쿄 주오구 긴자
헐렁했던 캐리어는, 마치 푸짐하게 식사를 한 위장 마냥 도쿄역 근처의 리쿼 샵에서 구입한 병으로 채워졌다. 무거운 짐을 호텔에 맡긴 후, 첫 행선지이자 여행의 계기가 된 그 오래된 바로 출발했다.
루팡으로 가는 길, 무사복이 진열된 전통 상점을 보았다. 긴자에서 가장 역사 깊은 바인 그곳과 닮아있었다.
그 후 허름한 골목길에서 바의 입구라던 철제문을 발견했다. 처음에 문을 밀었을 때는 꼼짝도 하지 않아, 혹시 휴무일까 걱정했지만 다시 밀어보니 문이 열렸다.
바의 역사가 100년에 가까워 보였다. 다자이 오사무 등 옛 문인들이 사랑한 곳이라 그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일본 바엔 대부분 자릿값의 일종인 커버 차지가 붙는다. 그래도 여긴 커버 차지가 800엔이니, 근처의 1,800엔을 받는 다른 가게보다 훨씬 저렴했다.
나는 럼 베이스 칵테일인 헤밍웨이 스타일 다이키리를 주문했다.
헤밍웨이 스타일이라고 하여 매우 독할 줄 알고 잔뜩 긴장해 있었는데, 생각보다 새콤달콤했다.
커버 차지가 있으나, 칵테일 한 잔 가격은 1,400엔으로 우리나라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양이 매우 적어서 누구 코에도 붙일 수 없었다.
옛날 바라 그런지, 바텐더도 손님도 모두 평균 연령이 높았다. 오너 바텐더는 사진에 있는 숀 코너리 닮은 할아버지인 것 같고, 다른 바텐더들은 모두 할머니셨다.
급격히 고령화된 일본 사회를 반영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왠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옆자리에 앉은 머리가 희끗한 단골손님을 보며, 젊을 때 다니는 바에 나이 들어서도 쭉 다닌다는 게 얼마나 멋진 것인지 얘기했다. 바텐더, 그리고 바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그럼 바 자체가 개인의 역사이자 기록이 될 수도 있겠지.
"우리도 그런 바가 있으면 좋겠다."
D가 말했다.
20세기 초중반의 문인들이 사랑한 유서 깊은 바, 루팡. 사실 이곳 때문에 여행이 시작됐으며, 나의 길고 긴 도쿄와의 인연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사실 맛보다는 특별한 분위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굉장히 낡은 건물과 레트로 한 느낌과 더불어, 바텐더와 함께 세월을 간직해온 연세 지긋한 단골손님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바’보다는 관광지에 가까운 곳이지만 한 번쯤 특별한 경험을 위해 가볼만하다.
실제로 기모노 입은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으나, 가게와 함께 세월을 간직한 나이 든 손님과 직원들이 큰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