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울린 아빠 친구의 이야기
남편이 지방 출장을 가 집에 오지 않는 날이었다.
퇴근 후 엄마집으로 가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엄마와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큰 냄비에 냉동곰탕을 붓고, 떡국떡과 내가 좋아하는 메밀만두를 넣어 금세 맛있는 떡만둣국을 뚝딱 끓여내셨다. 엄마와 마주앉아 저녁 식사를 하며, 엄마 홀로 주말에 아빠한테 다녀오셨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3년이 지났다. 그간 동생이 대학에 입학했고, 우리 둘 다 졸업과 취직을 했고, 나는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낳아, 그 아이가 지금 두 살이다.
엄마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며,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아이를 봐주신다. 나의 복직 이후 홀로 아이를 봐주시느라 엄마는 참으로 많이 고생하셨다. 손주가 예뻐 봐주시는 거지만 힘들다는 말씀도 많이 하셨고, 서로가 힘드니 친구같던 나와 엄마 사이에 갈등도 많이 생기곤 했다.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내게 절대적인 조력자이자 멘토인 엄마는 평일은 손주 보는 일에 올인하시고, 주말엔 당신의 시간을 가지신다. 지난 주말엔 아빠가 잠들어 계신 묘역에 가셔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근처에 살고 계신 아빠와 막역했던 친구분을 만나 식사를 하고 오셨다 한다.
그 아저씨는 나도 잘 아는 분이고,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우리와 연락을 지속하며 아빠 묘소에도 매번 들려주시는 감사한 분이다. 아빠가 잠들어 계신 자리에는 늘 아저씨가 남기고 가신 꽃이나 술병이 놓여져 있다.
내가 아저씨를 처음 뵈었던 기억은 대전의 어느 호텔에서 가족동반으로 아빠의 학사장교 동기 모임이 개최될 때였다. 그 때 아저씨가 모임의 회장이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술을 좋아하시고 호쾌하신 성격이 아빠랑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도 두 분은 매우 친하셔서 서로의 집에도 왕래하시고, 가족 혹은 부부 동반으로 놀러도 자주 다니셨던 것 같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내셨고, 아저씨와 아빠의 허물없는 사이를 아시는 엄마가 문득 아빠의 지난 날이 궁금해졌다. 아빠에 대해 엄마 당신은 모르지만 친구였던 아저씨는 알고 있는 사실이 있을까?
아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후, 엄마는 항상 '내가 남편을 서운하게 한 일이 있었을까? 남편이 나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을까?'를 곱씹어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반추해도 아빠가 결혼생활을 힘들어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기억에 아빠는 늘 행복해 하셨다고 한다.
아저씨께 엄마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혹시 우리 남편이, 00씨 만나서 내 얘기 한 적이 있나요? 나 때문에 힘들어했던 적 있나요?"
아저씨는 엄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엄마 얘기를 많이 했는데, 아빠는 진정 엄마밖에 몰랐노라고. 엄마가 엄청나게 훌륭한 와이프이자 아이들의 엄마고, 본인에게는 과분한 여자라고, 친구들 앞에서 엄마를 한껏 높였다 한다.
그래서 아저씨도 엄마를 굉장히 품위와 격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셨더랬다. 사교성 좋은 아빠가 집에 친구분들을 이끌고 잘 놀러오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엄마는 과일 하나를 내와도 정성스럽게, 대접받는 기분이 들도록 내와서 '경범이(울아빠) 부인은 역시 다르구나' 생각하셨다고.
내가 고등학생 때, 아빠가 군복을 벗으시고 공무원으로 재취업을 하시며 직장 때문에 부모님이 주말부부가 되셨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학업 때문에 아빠를 따라 이사를 가지 못하셨고, 대신 주말마다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그 시절에 대해 '내가 너희들에게 매진하던 시간동안 아빠를 혼자 둔 게 미안했다. 아빠도 많이 외로웠을거라 어떠한 재미를 추구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빠는 정말 나밖에 모르고 깨끗한 생활을 하더라.'고 회상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빠 친구 아저씨의 회상 또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혼 이후 아빠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도우미라도 있는 노래방에 가게 되면, 아주 칼같이 빠져나오셨다 한다. 거나하게 취해 친구들이 아무리 같이 가자 꼬셔도 단번에 자르고 집으로 갔다고. 굳이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신 건 아저씨도 그 당시 아빠의 행동이 인상 깊었나 보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마음이 그저 먹먹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 힘들 때면 먼저 가신 아빠를 원망도 많이 하셨다는 엄마이다. 왜 모든 짐을 나에게만 지우고 먼저 갔냐고,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엄마는 아빠를 보낸 슬픔을 딛고, 나와 동생을 위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사셨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원망으로 바뀌어 엄마는 조금 견딜만 하셨을까? 자신을 원망해보려 해도, 아빠를 힘들게 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차마 그러지 못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살기 위해 원망의 화살은 아빠에게로 향한 것 같다. 그리움보다는 훨씬 냉혹한 감정이기에, 차라리 원망이 편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엄마는 아빠를 더 이상 원망할 수 있을까? 아빠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깨달았다. 아빠는 말 뿐만 아니라 진정 행동으로도 엄마를 높여주었다는 것을. 엄마는 아빠로 인해 아직까지도 빛이 나고 있었다. 물론 아빠가 옆에 계셨을 땐 그 빛이 더욱 찬란했을 것이다.
엄마가 당신을 더 사랑하시고, 당신의 인생을 더욱 귀중히 여기시길 바란다. 그리고 먼저 가신 아빠에 대한 원망이 있다면, 그조차도 이제는 거두시길 바란다. 엄마와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건 바로 아빠의 사랑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퇴색하지도 않는 위대한 사랑의 힘을,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