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

by 지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앉아 있거나 누워서 지내는 엄마를 보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다. 엄마에게는 늘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빠였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태평양 같은 마음을 지녔던 할아버지.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지금의 엄마처럼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지병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큰 방 한편에서 누운 채로 보냈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어김없이 힘겨운 몸을 일으키고는,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어린 손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는 유모차를 타고,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동네 이곳저곳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먹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맛보고, 보고 싶은 것들을 실컷 눈에 담았다.

미로처럼 여기저기 재미나게 이어져 있던 골목길들과, 그 골목길들을 큰 나무처럼 따스하게 품고 있던 자그마한 동네는 나의 가장 큰 놀이터이자 어린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의 거의 전부였고, 할아버지는 내게 그 큰 세상의 든든한 안내자와도 같았다.



할아버지에게는 손녀와 세상 나들이를 하다 때때로 마시는 시장통 막걸리 한 사발이 커다란 낙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막걸리를 들이켜다가도 할아버지는, 내가 '할버지 집에 가자~'라고 말할라치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막걸리 잔을 턱, 하니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실은 유모차를 끌며 곧장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내게 변함없이 인자하고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어른이었다.

어린 손녀가 안정되고 따뜻한 정서를 유지하게 해 주었고, 단 한 번도 '합리'나 '이성'의 영역으로 나를 끌어들여 가르치려 들거나 무엇인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눈에는 손녀가 저지르는 못난 행동들 마저도 품어야 하는 대상이었던가보다. 그래서인지 내 추억 속 할아버지는 때때로 할머니에게 '애를 버려 놓는다'라고 크게 꾸지람을 듣곤 하던, 가련하고 따뜻하며 온화한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온기를 통해 나는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는 대신, 조용할 날 없던 어린 시절을 지나오면서도 빗나가지 않도록 지탱해 준 '튼튼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의 기억 속 할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어린 딸이 벌어 온 - 엄마는 스무 살 무렵부터 사회생활을 했다 - 월급은 고스란히 할아버지 수중에 들어갔고, 그럼에도 용돈을 올려달라는 말 한마디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딸에게는 '무서운 스크루지' 같은 아빠였다.

할아버지가 자고 있을 때면 딸들은 마치 잠자고 있는 사자를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까치발을 하고선 조심스럽게 집안을 걸어 다녀야 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엄마와 나에게 할아버지는 왜 이다지도 다른 사람이었을까, 의아스러웠는데 요즘 엄마가 손주들을 대하는 걸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딸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손주인 나는 한없이 감성적인 마음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 아이들의 할머니인 엄마는 딸인 내게는 '무심했던' 사람, 손주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관심'을 기울이는 할머니가 되었다.

아이들의 용돈, 교과서, 친구 관계, 양치질 유무, 학원, 필체, 왼손잡이, 말의 많고 적음,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주요 관심사다. 때때로 엄마는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아이들 방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나온다. 용돈이 들어 있는 아이들의 지갑을 들춰보며 근검절약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는 필기를 살펴보며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빼꼼 열린 방문 사이로 아이들의 동태를 살피기도 한다. 그러다 마음에 차지 않거나 불안한 부분이 생기면 내게 와서 더 신경 쓰고 개선할 것을 은근슬쩍 요구한다.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활동을 눈치챈,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아이들은 이런 할머니가 불편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에 일일이 간섭하고 독촉하려는 할머니가 아닌, 조금 더 너그럽게 지켜봐 주는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

이따금 엄마에게, 잔소리인지 부탁인지 나 자신도 헷갈린 채로, 말한다.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따지며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들지 말라고. 손주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할머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할아버지가 나를 대했듯. 아니면, 차라리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조금은 무심한 듯 아이들을 지켜봐 달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한 부모에게 울음보 터지도록 혼구녕이 난 손주가 쪼르르 달려가 품에 쏙 안긴 채 자신의 억울함을, 엄마 아빠의 악행(?)을 미주알고주알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원 없이 품어주고 베풀어주는 사람. 따뜻한 기억의 자리 한가운데 큰 나무처럼 서 있는 사람. 그리하여 훗날 문득문득 아련한 추억으로 소환할 수 있는, 가슴 가득 따뜻함을 안겨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성적인 역할은 엄마, 아빠가 차고 넘치도록 할 테니.



오늘도 난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미래의 손주들에게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나는,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손주들에게 과하도록 사랑을 주기만 하는 할머니가 아닌, 손주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는 할머니가.

그러기 위해서 늘 공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를 먼저 건네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나저나, 엄마는 사랑받는 할머니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내 말은 귓등으로만 들었나 보다. 오늘도 아이들 가방 속에 들어있는 성적표를 뒤적인다. 저러다 아이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엄마의 내일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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