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눈을 떴다. 눈앞에 빨간 점들이 잔상처럼 희미하게 일렁였다. 땀으로 흥건한 등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머리맡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눈앞으로 올려 들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선 아침, 시계는 일곱시를 향하고 있었다.
밤새 눈이 내렸나 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지붕 위 새하얗게 내려앉아있는 눈과 하늘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닿아 있었다. 하늘을 가르며 시원하게 날아가는 비행기 소리가 꿈결인 듯 날아들었다. 순간 훅, 코끝으로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녹아내리고 있는 눈 때문일까, 아니면 꿈 때문인 걸까.
내겐 냄새로 기억되는 꿈이 있다. 안개 속에 갇혀 있는 듯 기억은 흐릿하지만 냄새만큼은 몸 이곳저곳에 배어있는 것 같은 그런 꿈. 비 온 뒤 촉촉해진 흙길 위에서, 할머니와 함께 간 새벽시장 한 귀퉁이에서, 설거지를 끝낸 후 물기가 채 마르기 전의 부엌 한 켠이나 체육시간 직후 교실에서 나는 그 냄새를 기억해 낸다. 언제부터 이 꿈이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유치원 무렵부터였을까? 꿈을 깨고 나면 한바탕 사투를 벌이고 온 양 두 팔이 욱신거리곤 한다. 그리고 왠지 모를 두려운 감정에 빠져든다.
사라져 가는 비행기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집에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이런 내 마음을 전했을 때 할머니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할매 맘 편하라꼬 그리 말하제? 공부에 방해돼서 우야꼬. 우리 신우 고3 되기 전에 얼른 이사를 가야 할 낀데….”
내 주변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를 싫어하는 것 같다. 몇 년 전에는 인근 빌라와 아파트 주민들이 합세해서 공항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열대지방의 숲 한가운데에 서서 듣는 ‘스콜’의 소리처럼 가슴을 뻥 뚫어주는 비행기 소리가 좋다. 사실, 아직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는 나는 스콜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평소에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별로 없다. 공부를 할 때, 길을 걸어갈 때, 낯선 시선들과 마주칠 때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는 이런 내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만든다. 비행기에 시선을 뺏긴 나는 그제야 하늘을 품고 있는 밝고 따스한 햇살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비행기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에메랄드 빛 바다를 건너 엄마가 살고 있다는 하와이로 날아갈까, 아니면 열대 숲이 빽빽이 우거져있을 동남아시아의 어느 낯선 도시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걸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자꾸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내달리는 마음을 잡아들인다. 내 시선은 다시금 땅을 향해 낮아진다.
할머니와 네 살 난 사촌동생 미야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미야의 엄마이자 이 집의 주인인 고모는 마야를 보기 위해 가끔 집에 들른다. 고모는 몇 년 전에 고모부와 헤어졌다. 사람들은 왜 결혼이란 걸 할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사랑이 그리 가벼운 감정이라면, 그렇게 쉽게 헤어질 인연이라면, 그냥 혼자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나처럼 혼자 남겨지는 아이도 없을 텐데 말이다.
내겐 부모님이 안 계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다. 부모님은 내가 여섯 살 무렵 이혼했다. 그 후 엄마는 재혼해 하와이로 이민을 갔고, 아빠는 큰집—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이 표현이 감옥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몇 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함께 살지 않고, 아빠는 나쁜 사람인 거냐고 소리 지르고 발버둥 쳤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따스하게 보듬어주며 말했다.
“니는 아빠랑은 다르대이. 우리 신우는 아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될 끼라.”
이따금 아빠를 큰집으로 불러들인 ‘죄’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여러 번 할머니에게 물어봤지만 ‘좀 큰 잘못’ 내지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알려주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빠를 만난 적은 없지만, 신기하리만치 아빠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부모님 얼굴은 기억나질 않는다. 흐릿하게라도 떠오를 법한데, 유치원 이전의 기억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내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졌다. 할머니 말처럼 그 이후에 우리가 완전히 다른 장소로 이사를 왔기 때문일까?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지만, 내겐 여섯 살 이전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나 홀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을 제외하고는. 이사하는 과정에서 옛 사진들이 모조리 분실되었기 때문이란다. 가끔은 꼬마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에 가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먼 곳이라고, 여기가 거기보다 나은 곳이니 궁금해할 것 없다고 말한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면서 홀로 삼 남매를 키워낸 할머니는 올해로 일흔다섯이 되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등도 약간 굽고 다리도 불편하지만, 오랜 세월 집안을 지탱해 온 그 억척스러움이 지금도 할머니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다.
고모와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어조와는 달리 나를 향한 고모의 시선은 늘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때로는 애처로운 듯 나를 바라보지만, 대체로 경멸과 두려움이 묘하게 섞여있는 듯한 눈빛을 보이는 고모. 이런 고모는 나의 공식적 보호자다. 나는 ‘가정위탁아동’, 고모는 국가가 인정한 나의 ‘양육자’다.
아빠는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지만, 나는 고모의 눈빛을 마주하면 늘 원죄를 지은 듯 마음이 움츠러든다. 그래서인지, 고모가 오는 날이면 이 집이 나에겐 감옥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