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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Oct 27. 2024

#22 우리가 어울릴까?

 고모는 새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지인이 소개해 준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인데, 아이들 부모는 ‘사’ 자 달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란다. 처음엔 가사 일만 하기로 했던 고모는, 아이들의 등하원을 도와주면 수고비를 훨씬 올려주겠다는 부모의 제안에, 아이들 등하원에다 오후 돌봄까지 맡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타인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정작 고모 자신의 아이는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 내게는 이상해 보였지만, 고모는 미야를 생각하면 포기하기 힘든 자리라고 말했다. 40대 경력단절 여성으로 그만한 조건에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덧붙이며. 미야와 같은 집에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모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고모가 도우미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종종 미야의 하원을 책임지게 되었다. 물론 고모가 내게 먼저 부탁하지는 않았다. 그건 오롯이 내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고모는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 이후 나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고모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고모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해놓고도 막상 시작해 보니 미야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편이 나았다. 미야는 ‘싫어!’라는 말을 기본값처럼 입에 달고 있었고, 시시때때로 보챘으며 수시로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내가 들어주기 꽤나 힘든. 사람들이 왜 ‘미운 네 살’이라고 하는지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 작고 여린 몸으로 나와 미야를 어떻게 키웠을까? 미야와 있다 보면 때때로 울컥해질 때가 있다.


  아이들로 북적이는 활기 넘치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미야를 돌보면서부터 맘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존재 같다. 옆집 강아지들은 어미젖만 먹고 혼자서도 잘만 크는 것 같던데, 아기들은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나 싶어 답답해지곤 한다.


  송이는 나와 생각이 달라 보였다. 송이는 미야가 귀여워 죽겠다고 했다. 아마 송이도 막무가내로 떼쓰는 미야 모습을 보면 내 심정이 이해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야는 진호 앞에서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내보였던 것 같다. 유독 내 앞에서만 박하게 구는 미야에게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지만, 미야 덕분에 송이와 나눌 얘기가 더 많아진 것 같아 지금의 내 상황이 그저 싫지만은 않았다. 혹여 아이를 다루는 내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미야가 나를 만만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미야가 나를 더 잘 따르게 할 수 있을까. 이따금 나는 고등학생이 하기엔 다소 이상한, 육아에 관련된 고민에 빠져들곤 한다.


 고모가 사정이 있어 조금 늦는다고 연락해 온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아침 냉장고에 미야가 먹을 만한 게 없다는 걸 확인했던 나는, 미야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장을 보러 갔다.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할머니의 두부 반찬과 콩나물국이 떠올랐다.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불현듯 무엇인가가 목을 막고 있는 것처럼 숨쉬기가 답답해져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려는데, 미야가 또다시 보채기 시작했다. 학교가방이 무거워지는 느낌과 비례해 미야를 잡은 내 손이 지쳐갔다. 초겨울의 날씨에도 이마에 식은땀이 솟아났고, 땀으로 눅눅해진 등 때문에 옷이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송이 생각이 났다. 핸드폰 창을 여닫기를 여러 차례, 결국 나는 송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쯤 울렸을 때 송이 목소리가 내 귀로 와락 달려들었다.


  “이 시간에 웬일?”

  “지금 바빠?”

  “아니, 별로. 근데, 왜?”

  “혹시, 나 좀 구해줄 수 있어?”

  “뭘 하기에?”

  “그게, 육아….”


  송이의 웃음소리에 귀청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송이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내 부탁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관대함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구조신호 보낼 만도 하네.”


  코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연신 들려왔고, 나는 웃다 못해 마구 씰룩거리고 있는 송이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핸드폰 버튼을 누른 내 손가락이 원망스러워졌다.


  십분 쯤 후 송이가 나타났다. 그 십 분 동안, 마치 시간의 저주라도 걸린 듯, 시간이 열 배는 더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역시나 미야는 송이를 보자 보채기를 멈추고 순한 아기 양처럼 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순간의 미야가 조금 얄미워 보였다.


  “저녁거리라도 사는 거야?”


  어쩐지 송이의 얼굴에는 좋아하는 일을 앞둔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내 곤란한 상황이 송이에게는 즐거움으로 다가간 것 같아, 금세 달려와 준 송이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약이 오르기도 했다.


  “그런 셈이지.”


  내가 답했다.


  “너 잘 어울린다. 싱글 대디 같아. 큭큭. 그나저나 교복은 언제 갈아입었냐?”

  “갈아입은 거 아니고, 그냥 위에 후드만 걸친 거야.”


  신세 지는 입장임에도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와 버렸다. 이럴 땐 송이가 예민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상황에서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선 쌩하니 되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 저녁은 뭘 먹을 건데?”

  “김치, 찌개…?”

  “야, 그 짜고 매운 걸 아기한테 먹인다고? 얘, 안 되겠네.”


  송이가 혀를 차며 내 눈앞에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럼, 뭘 먹여?”

  “나만 따라와.”


  주부 역할에 빙의라도 된 듯 송이는 마트 이곳저곳으로 나와 미야를 끌고 다녔다. 송이와 마트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카트에 갖가지 음식재료들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부 판매 코너 앞에 멈춰 선 송이가 진열되어 있는 두부들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걸로 할까?”

  “두부는 질리도록 먹었어.”

 

  ‘질리도록’이라는 말을 뱉어놓고 죄를 지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겹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매일 아침 밥통에서 쌀이 익어가던 소리, 학교 갈 준비 하라며 나를 독촉하던 할머니의 억센 말투, 아지랑이 같은 김이 올라오던, 양념이 덜 된 할머니의 콩나물국…. 코끝이 아려오는 걸 감추기 위해 다른 매대를 살피는 척 고개를 돌렸다. 눈치채지 못한 듯 송이가 말을 이었다.


  “아기들은 단백질을 많이 먹어야 해. 그리고 음식은 가급적 싱겁게. 그게 기본이지.”


  그때였다.


  “나, 저거 먹고 싶어.”


  시식코너에서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며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 만두를 가리키며 미야가 말했다.


  “그래. 만두도 좋지!”


  송이가 미야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시식코너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표정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천천히 카트를 끌면서 송이 뒤를 따랐다. 송이가 뜨거운 만두를 호호, 소리 나게 불더니 이쑤시개로 야무지게 찍어 미야 입에 넣어주었다.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아기 엄마, 오늘 만두 할인행사 하니까 하나 사 가요. 아기가 잘 먹네. 서비스 많이 드릴게.”


  송이가 멈칫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눈치 없는 듯한 직원이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기 아빠도 이리 와서 한번 먹어봐요.”


  직원이 나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고, 송이가 내 쪽을 돌아봤다. 당황한 나와 뜨악한 표정의 송이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본 송이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가 싶던 순간, 송이가 시식코너 직원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걸로 주세요. 정말 맛있네요!”     


  마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송이가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어딜 봐서 아기 엄마야?”


  왠지 송이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아기 아빠 같고?”


  나야말로 좀 전의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너야, 나보다는….”


  송이가 말을 흐렸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송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데, 우리가 어울려 보이나…?”


  송이가 내 눈을 피하더니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미야를 데리고 앞서 갔다. 송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함께 서 있는 우리 모습이 어떻게 비쳐 보일까 상상했다.


  어안이 벙벙한 끝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이런 내 모습이 영 어색해 또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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