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을 얼마 앞둔 일요일 오후, 송이와 진호를 운암천 자전거 대여소 앞에서 만났다. 비가 훑고 지나간 대기에 스며 있는 물비린내가 불편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너, 괜찮아? 얼굴이 창백한데?”
송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제 야간 뛰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조금 피곤하네.”
피곤한 것과 메스꺼움을 동반하는 불편함이 그다지 상관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송이에게 이렇게 답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그냥 버스 타고 갈 걸 그랬나?”
송이가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핸드폰 창을 열었다.
“아니야, 괜찮아. 자전거 탈 수 있어.”
나는 일부러 앞장서 자전거 대여소 안으로 들어섰다. 대여소에는 미야만 한 아기에게 적합해 보이는 세 발 자전거부터 사이클 선수들이 탈 것 같은 크고 날렵한 외양을 지닌 것까지,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자전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어떤 자전거를 선택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중학교 시절 타 본 것과 유사한, 바퀴가 거의 허리아래까지 올라오는 군청색 자전거를 골랐다. 나를 곁눈질하던 진호는 내 것과 동일한 종류에 색상만 다른 자전거를, 송이는 몸체가 낮고 손잡이 사이에 작은 바구니가 달린 빨간색 자전거를 빌렸다.
운암천변의 자전거 도로로 내려오니 구름이 걷혀 있었다. 주말의 운암천은, 불과 몇 달 전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장소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산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활기를 띄었다. 이럴 땐 우리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어주는 시간에 고마움을 느낀다.
천변을 따라 물들기 시작한 단풍들이 운암천에 생기를 더했다. 계절의 기운에 더해진 사람들의 에너지가 대기에 환한 빛깔을 덧입혀 주는 것 같았다. 사실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약속을 미루고 잠을 좀 더 잘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비가 그친 뒤, 이제 막 천연 염색을 끝내고 나온 새 옷감처럼 선명해진 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억지로라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메스꺼운 느낌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속이 가라앉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자전거를 타러 오자고 제안했던 송이가 실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송이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친구들과 몇 번 자전거를 타 본 경험이 전부라고 나와 진호에게 실토했다.
“잘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왜 타러 오자고 한 거야?”
내가 물었다.
“오랫동안 못 탔으니까 타고 싶은 거지. 실력도 재충전할 겸.”
송이의 대답에 진호와 내가 동시에 실소를 내뱉었다. 몇 해 전, 몇 번 타 본 자전거 경험이 전부인 송이에게 ‘실력’이라 일컬을 만한 감각이 있을지, ‘재충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의심스럽던 찰나, 얼마 전 집으로 나를 찾아왔던 송이의 모습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송이가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말했던 건 나를 위해서였을까.
“우리, 공항 도착하면 캄캄해지겠다.”
진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송이를 쏘아봤다.
“나, 운동 신경 좋다. 금방 잘 탈 거니까 걱정 마.”
진호와 내가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교환했지만, 송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고 십여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정말로 송이는 안정감 있게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운동 신경이 송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짜 문제는 속도였다. 송이의 자전거는 바퀴가 작아 속도가 잘 붙지 않았고, 진호와 나는 멈추어 서기를 반복하며 송이와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다. 연신 뒤쪽을 돌아보며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힘들어 어느 순간부터 진호와 나는 송이를 앞세우고 뒤를 따랐다. 천천히, 주변 풍경에 시선을 내어주며.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고 바람결에 기분 좋은 향기가 묻어났다. 계절이 안겨 주는 풍경이 은은한 향기와 어우러져 어젯밤 쌓인 피로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우리는 길 중간중간 벤치에 앉아 잠시 호흡을 고르고 운암천 너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송이는 마치 조류해설사라도 된 듯 운암천을 오고 가는 새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시간에 쫓기던 마음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공항의 모습이 점점 더 명징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 시간 반가량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공항 근처에 도착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속도를 내지 못해 답답하기도 했지만, 가을 정취에 젖어들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공항의 관제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맞닥뜨린 공항의 탁 트인 전경은 한 시간 넘게 감수해야 했던 수고로움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공항은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 어딘가에서 도착한 사람들로 붐볐다. 여행의 시작과 끝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알록달록한 풍선 하나씩을 매달고 있는 듯 들뜬 여행객들의 얼굴 저 너머로 각양각색의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제껏 지상에서 봐 왔던 것의 수십 배는 더 되어 보이는 비행기 동체를 근접해서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 같았다. 좁은 새장을 벗어나 저 높은 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가 된 것처럼, 나를 붙들어 메고 있던 것들을 떨쳐내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던 순간이었다.
공항은 없는 것이 없어 보이는 하나의 거대한 섬이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톰 행크스 배우 주연의 영화 '터미널'을 보며, 공항에서 십 년이란 세월을 버티는 게 가능할까,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직접 그 공간에 들어서 보니, 그러한 상황이 현실에서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림이나 영상 속 공항과 내가 직접 몸을 담그고 있는 이곳은 사뭇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입국장 앞에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출입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눈으로 맞이했고, 족히 십 층 건물 높이는 될 것 같은 천장 아래의 출국장 입구에서,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지구상에 있는 온갖 도시들의 이름을 품고 있는 거대한 전광판이 역동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전광판에 뜨는 도시 이름을 보고 그 도시가 속한 나라이름 맞히기 게임을 했다. 가장 먼저 틀리는 사람이 세 명의 간식을 책임지기로 하고 송이, 진호, 나 순서로 돌아가며.
“시카고, 미국.”
송이가 제일 먼저 자신 있게 말했고,
“방콕, 태국.”
진호가 뒤를 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독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도, 내기가 걸려있어서인지,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다 내 차례에서 그만
“호놀룰루, 하와이.”라고 말하자, 송이와 진호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야, 하와이는 나라 이름이 아니잖아?! 오늘 우리 간식은 신우 네가 책임지는 걸로!”
송이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마구 올라갔다.
“그런데, 이 게임은 내가 좀 불리한 것 같다. 난 비행기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이게 비행기랑 뭔 상관이냐? 이건 지리에 관한 지식이지.”
내 변명에 송이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핀잔을 주었다. 그 순간에도 내 혀끝에서는 계속 ‘하와이’가 맴돌았다.
내게 공항은 늘 상상 속 공간이었다. 나 홀로 타는 비행기, 드높은 하늘, 에메랄드 빛 바다, 미소 짓는 엄마, 하와이 그리고 꿈과 이어지는 곳. 하와이로 날아갈 이유가 뭉텅이째 빠져나가 공허해진 마음을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던 순간, 내 곁에서 웃고 떠드는 송이와 진호의 모습이 그토록 고맙게 느껴질 줄 예전엔 상상조차 못 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새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공항에 발 딛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운은 일상적인 장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의 에너지가 넘쳤다. 자꾸만 그들 가운데 서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됐고, 몽글몽글해지는 가슴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에 가벼운 리듬이 실렸다. 그렇게 걷기를 한 시간 여, 송이가 허기진 배를 채우러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일층 중앙 홀 바로 옆의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햄버거가 나오기 직전, 중앙 홀에서 작은 콘서트가 시작됐다. 네 명의 연주자들이 피아노와 현악기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아름다운 선율이, 마치 형형색색의 고운 실타래들이 굽이굽이 풀어헤쳐지듯, 드넓은 여객터미널의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잔잔하고 감미로운 피아노 독주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이 음악, 너무 좋지 않냐?”
송이는 자기만의 감성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곡명이 뭔데?”
내가 물었다.
“영화 주제곡인데, 제목이 '러브 어페어(Love Affair)'. 옛날 영화야. 난 아직 사랑을 잘 모르지만 이 음악만 들으면 왠지 내가 사랑에 빠진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아.”
“넌 옛날 영화를 많이 아는 것 같다?”
“난 오래된 영화들이 멋있더라. 그리고 좀, 있어 보이잖아, 다른 애들이 모르는 영화를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하면…?”
내 질문에 답하는 송이의 눈에 흐뭇한 기운이 어른거렸다. 아마도 옛 영화는 송이의 자긍심과도 연관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러브 어페어', sk#?@g ₩@?”
진호가 자기 입보다 두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햄버거를 한 입에 욱여넣느라 애쓰면서 송이에게 물었다.
“정사. 제목도 맘에 들어. 비밀스러운 뭔가가 숨어 있는 것 같거든.”
웅얼거리는 진호의 말이 내게는 불명확하게 들렸지만, 신기하게도 송이는 미야와 대화할 때처럼 진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 들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송이의 귀를 밝게 만든 것일 테지.
“정사가 뭐야?”
입 안의 음식물을 다 삼켰는지 이번에는 진호의 발음이 또렷이 들렸다. 어쩌면 진호는 어렴풋이 짐작되는 사실을 송이에게서 정확히 확인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있잖아, 그거. 남자랑 여자랑 그렇고 그런 거….”
송이가 속삭이듯 말끝을 흐렸다.
“그렇고, 그런 거?”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진호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정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내 입으로 설명하기가 무안해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것. 언젠가 너희도 할 그것. 아닌가, 벌써 해본 건가?”
송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진호의 얼굴에서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가시지 않자 송이가 신이 난 듯한 얼굴로 나와 진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넌, 여자가 못하는 말이 없냐?!”
송이를 나무라는 모양새가 되어버려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게다가'여자'라는 말이 들어가 버렸으니.
“그럼, 내가 남자면 아무 말해도 괜찮다는 거야? 너, 그거 여성 차별적인 발언인 거 알아?”
역시 송이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
“아니, 내 말은….”
송이를 상대로 더 말해봐야 내 말문만 막힐 것 같았다. 송이에게 핀잔주듯 말했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송이가, 외계 행성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런데, 요즘 근수 왜 자꾸 너한테 뭐라고 해? 혹시 너를 괴롭히는 거야?”
다행히 진호가 화제를 돌렸다. 평소에 없던 눈치가 별안간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끼어든 진호의 질문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근수와 나 사이의 일이 쓸데없이 불거질까 봐 조금 염려스럽기도 했다.
“너는 안 괴롭혀?”
내가 진호에게 되물었다. 역시 이럴 땐 반문하는 게 상황 모면을 위해 도움이 된다.
“요즘은 좀 괜찮아. 다 신우 덕분이야.”
하지만 송이는 진호가 내게 던진 질문에 더 관심을 보였다.
“최근에 근수 걔 좀 이상해 보이던데. 혼자 있을 때도 많아 보이고. 너한테 뭐라 그러는데?”
“… 내가 좋대.”
어물쩍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고, 그럴 바에야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듣자마자 송이가 풉, 소리와 함께 입안에 머금고 있던 콜라를 내 얼굴에 뿜어냈다.
“야! 너는, 진짜!!”
진동하는 콜라향에 취한 듯 눈앞이 흐려졌다. 진호가 폭소를 터뜨리며 냅킨으로 내 얼굴을 훔쳐냈다. 병 주고 약 주는 사람처럼.
“아, 미안, 미안! 너무 충격적인 말이라… 근수 걔 너한테 한 대 맞더니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근데 너 진짜 괴롭긴 하겠다. 확실히 근수가 너를 괴롭히는 거 맞네, 맞아. 그것도 제대로.”
송이가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좀 전까지 큰 소리로 웃어대던 진호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린 듯했다. 진호는 여전히 자기 때문에 내가 근수와 엮여 맘 고생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우리는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다가 이륙하는 비행기가 잘 보이는 자리로 이동했다. 비행기들만큼이나 여행객들의 손에 들린 여행가방도 다채로웠다. 문득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개중엔 분명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간 나도 하와이에 갈 수 있을까? 이제 엄마가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나는 '하와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꽤 오랜 시간 내게 하와이는 엄마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공항에 왔을 뿐인데 반쯤은 여행한 것 같은 기분이다. 좋아.”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송이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송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다.
“나도 어디 갈 곳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송이에 이어서 말하자,
“베트남 가자니까.”
진호가 대꾸했다.
“야, 베트남 나도 가자.” 송이의 말에,
“넌 안 돼.”
진호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왜 안 돼?”
“너는 정신이 없어. 그리고 너~무 시끄러워!”
송이가 진호를 보며 눈을 치떴고, 나는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진호는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송이의 적수였다.
“이신우 너, 또 그 빌어먹을 웃는 타이밍! 너희 둘 다 가만 안 둬!!”
송이가 손바닥으로 진호와 나를 번갈아 매섭게 내려쳤다. 팔이 얼얼했다. 그런데도 웃음이 계속 나왔다. 한 번 터진 웃음은 이상하리만치 진정이 잘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진호와 송이 때문에 웃었는데, 그다음에는 내 웃음소리가 웃겨서 웃고, 웃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극한의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보다. 지극한 기쁨이 눈물이 되고, 형용할 수 없이 슬프면 아린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됐어. 어차피 난 하와이로 갈 거야. 와이키키 해변으로!”
송이의 입에서 나온 ‘하와이’라는 말에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왜 많고 많은 해변 중에서 송이는 하필 와이키키로 가겠다는 걸까.
“거기 가서 뭐 해?”
진호가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비키니 입고 해변 끝에서 끝까지 걸을 거야. 우아하게.”
진호의 웃음소리가 다시 폭발한 건 그때였다.
“푸하하~ 그런데, 혼자서 갈 거야?”
“아니지. 남자친구랑 가야지. 근데 너 왜 웃어, 기분 나쁘게?!”
진호를 바라보는 송이의 시선이 화살촉처럼 뾰족했다. 어쩐지 송이의 입에서 나온 '남자 친구'라는 말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송이한테 남자친구 생길까?”
다시 돌아온 눈치 없는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게, 진짜!!”
송이가 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 쥔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송이 너 비키니 입으면 예쁠까?”
진호의 시선이 송이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는 것과 동시에 송이의 드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야!!!”
진호는 이따금 이해 안 될 정도로 위태롭게 군다.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그렇게 송이와 진호의 대화가 프라이팬 위로 튀어 오르는 팝콘처럼 오갔고, 마지막 진호의 말에 송이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가자! 기분 나빠서 더는 못 있겠다.”
송이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송이는 금방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태세였지만, 나는 송이, 진호와 함께 공항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이 넓은 공항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고마워. 좀 있으면 내 생일인데. 내가 받아본 것 중 최고의 선물이었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아마도 그건 내 진심이었을 거다. 내게 이보다 더 고마운 마음이 들게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내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자 송이가 놀란 표정을 내보이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생일 선물로 뭐 받아봤는데?”
귀를 찌르던 송이의 목소리가 무뎌져 있었다.
“할머니가 끓여준 미역국.”
내 생일은, 해산물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콩나물 국이 아닌, 할머니의 미역국에는 식감도 쫄깃쫄깃한 바지락이 풍성한 선물처럼 들어있었다. 그 느낌이 좋았던 나는, 바지락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입안에서 요리조리 굴리며 장난을 치곤 했다.
“그게 다야? 미역국은 너 엄마 뱃속에 있을 때도 질리도록 먹었을 텐데….”
‘엄마 뱃속’이라는 말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럼, 뭘 받아야 좋은 건데?”
“글쎄… 그래도 미역국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지.”
송이가 나를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송이가 입술을 씰룩인다는 건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다는 표시다.
진지한 표정의 송이 너머 공항 전면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말개져 있었다. 바다를 닮은 하늘 속으로 비행기들이 퐁당, 날아오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피곤함이 밀려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머리는 한층 맑아진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으려다가 송이가 언급했던 영화 '러브 어페어'를 떠올렸다. 그러자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호기심이 타올랐다. 영화 주제곡에 귀를 내맡긴 채 오늘 하루 보았던 풍경, 우리가 나눈 대화들, 내가 느꼈던 감흥을 되새김질하며 주인공의 그 마음을 상상해 봤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였다. 내가 잠이 든 건 새벽녘이 다 되어서였다.
꿈을 꿨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누군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내 쪽으로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에메랄드 빛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그 바다를 닮은 하늘을 시원하게 가르며 날아오르는 거대한 날개에 시선이 붙잡힌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어루만지듯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멀미가 날 것 같은 느낌이 잦아들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