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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02. 2024

#23 거부하고 싶은 무의식

  때때로 무의식이 내 몸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상야릇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몽정을 시작한 무렵부터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지만 요즘처럼 구체적이고 잦은 빈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고 일어나면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거다. 그것도 밤꽃향기를 짙게 풍기며.


  할머니 생전에는 내 젖은 속옷들을 세탁기 깊숙이 밀어 넣어두면 되었다. 재활용품을 줍던 할머니는 땀에 절은 옷을 매일 갈아입었고, 할머니의 옷들에 내 속옷 냄새는 감쪽같이 묻힐 수 있었다. 그러나 고모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모는 나보다 더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다. 고모에게는 이런 상황을 절대 들키면 안 된다. 가뜩이나 나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고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를 다리가 스무 개쯤 달린 벌레 보듯 할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에 하지 않던 손세탁을 시작했다. 어떤 땐 일주일에도 몇 벌씩 손세탁한 속옷들이 빨랫줄에 널렸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나는, 혹여 속옷들이 고모 눈에 띌까 봐 물기가 마르는 대로 그것들을 바로바로 걷어 옷장에 개켜 넣기 바빴다.


  피곤한 날에는 현실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내 무의식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왜 요즘 따라 계속 이런 꿈을 꾸게 되는 건지. 야한 동영상을 보는 것도, 특별히 그런 상상을 더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꿈을 깬 아침이면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다가, 익숙한 듯 묘한 향기와 함께 뜨거운 감촉이 떠오르다가, 이내 뜀박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심장박동이 거칠어진다.


  요즘 송이를 보면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송이가 “이신우!”라고 부를 때, 생각에 잠긴 채 조그만 입술을 씰룩일 때, 채 마르지 않은 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길 때, 왠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 송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 송이의 눈이 고요히 빛날 때 그리고 송이와 나의 몸이 우연히 스치게 될 때.…. 하루는 이런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 괜스레 송이에게 한 마디 던졌다.


  “너, 머리가 꼭 처녀귀신같다?!”

  “뭐래?!”


  송이가 특유의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고무줄을 꺼내 머리를 질끈 묶고는 뒤돌아 갔다. 그런데 머리를 묶은 채 사라지는 송이의 뒷목을 바라보다 나는 더 묘한 기분에 빠져 버렸다.     


  생일 즈음 이나 선생님에게서 손편지를 받았다.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편지지가, 때때로 이나 선생님이 짓는 표정을 닮은 ‘스마일 이모티콘’ 스티커로 봉해진 파란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집에 가서 신우 혼자 있을 때 읽어 봐.”


  뒤늦게 과제를 제출하러 간 자리에서, 마치 유리가 깨질세라 조심하는 사람처럼, 이나 선생님이 두 손으로 감싸 쥔 편지 봉투를 내게 건넸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됐지만, 나는 그냥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선생님한테 받는 손편지는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쭈뼛거리는 내가 우스웠던지 선생님의 입가에 잠시 웃음기가 어렸다.


  편지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봉투를 뜯지 않고 귀가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연신 만지작댄 바람에 봉투 가장자리가 구겨지긴 했으나. 선생님의 필체로 채워진 편지를 마주하자 집으로 돌아온 후 편지를 읽으라고 한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이 그날의 일상에 적당한 긴장감과 생기를 얹어주었고, 짧지 않은 기다림 끝에 나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나 선생님의 편지를, 서서히 단물이 스며 나오는 쌀알을 입안에서 오래도록 음미하듯 한 줄 한 줄 곱씹어볼수록, 종이 한 장을 채 채우지 못한 짧은 글이 내 일상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편지가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어둠 속에서도 내용을 환하게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편지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고 돌아서면 금세 또다시 펼쳐 보고 싶었다. 이나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말했던 '글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왠지 모르겠지만, 편지가 해질 때쯤 아빠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에게 물었다. 아빠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고모에게 아빠에 대한 질문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고모는 주저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답을 건네주었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많았지만 아빠를 마주하는 나를 머릿속에 그려 본 기억은 없다. 아니,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나는 단지 아빠가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아빠를 만나는 내가 느낄 감정이 두려웠던 것 같다.     




  할머니가 떠난 빈자리에 적응해 가는 사이, 떨어진 낙엽들이 거리에 소복해지기도 전에 계절은 성큼 겨울로 달아나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면서 내 마음도 바람이 곁드는 듯 공허감이 커져갔다. 나도 계절을 타는 건가 싶던 어느 날, 송이에게서 근수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근수 녀석이 요즘 통 보이질 않았다.


  그 무렵 송이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겨울 철새를 보러 갈 계획을 짜고 있던 송이는 새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필요한 장비들을 알아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어떤 대상에 순수하고 열정적인 애정을 주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에너지가 그즈음의 송이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송이의 지나친 열의가 이따금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나와는 다른 송이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송이에게서 근수의 소식을 들었던 날이었다. 전날 밤 또 야릇한 꿈을 꿨던 나는, 송이가 근접해 오는 게 불편했다. 다행히 송이는 어색했을 내 표정과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주번이었던 나는 아이들이 하교한 후 교실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교실에는 몇몇의 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송이와 진호도 개중 한 명이었다.


  물걸레로 칠판을 닦고 있던 때였다. 내 등 뒤로 송이가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송이가 교탁 위에 두 팔을 올린 채, 청소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색해진 나는, 걸레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어 '뽀드득' 소리가 날 지경으로 칠판 닦는 것에 집중하려 했지만, 자꾸만 간질거리는 뒤통수 때문에 결국 걸레질을 멈추고 송이를 돌아봤다.


  “너, 집에 안 가냐?”


  내가 물었다.


  “네가 가지 말라고 사정해도 곧 갈 거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웃음기 서린 송이의 눈매가 그날따라 유난히 짓궂어 보였다.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마라. 청소에 방해되니까.”

  “너한테 해 줄 말이 있어서… 그 말만 하고 갈 거야.”

  “뭔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차분히 내려했는데 미안할 정도로 냉랭한 말투가 나와버렸다. 송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으나.


  “너, 이제 보니 뒤태가 남다르다?”


  송이가 말했다. 당황한 것과 별개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턱밑까지 다가와 있는 송이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거스러미처럼 자꾸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야, 넌 여자가….”

  “또, 또! 내가 그거 여성 차별적 발언이라고 말했을 텐데! 너, 이럴 때 보면 진짜 우리 할아버지 같다?!”

  “그게 굳이 교실에 남아서 나한테 해 줄 말이야?”

  “그건 아니고. 근수 말이야….”


  근수의 이름이 들려서였을까, 자리에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던 진호도 교탁 근처로 다가왔다.


  “근수, 왜?”


역시 진호는 근수의 근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근수랑 같은 반인 내 친구가 그러던데, 근수 자퇴 한다더라. 아 그리고, 진짜 대박 충격적인 얘기 들었어.”

  “충격적인 얘기, 뭐?”


  진호가 송이를 채근했다.


  “근수 걔, 게이라는 소문이 돌더라고. 그 얘기 듣는데 신우 네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나더라. 근수가 너 좋다고 했다던 말…. 그래서 근수 걔 자퇴하는 건가? 혹여, 전교에 소문이라도 날까 봐?!”


송이가 자기의 말에 놀란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정말이야?”


  이렇게 묻는 진호의 목소리에 또다시 근심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인지는 나도 모르지. 아무튼, 이제 근수가 신우 너 괴롭힐 일은 없을 거니까 안심하란 얘기 해 주려고….”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근수 걔, 그런 애 아닌데….”


 ‘그런 애’라는 말을 뱉어놓고 한동안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닌 척 하지만, 나도 편견에 갇혀 어떤 이들에게 상처가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근수는 중학교 때도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평소 여자에게 관심도 많았고, 19금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애였다. 그래서 근수가 내게 ‘좋다’고 말하며 내 주변을 얼씬거릴 때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득 근수에게 얘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서로의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내보여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근수가 내 주변을 맴돌았을 때 내가 근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줬더라면, 중학교 시절 근수가 내게 그랬듯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줬더라면, 근수가 자퇴를 결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음에 근수가 또다시 편의점으로 찾아오면 그땐 제대로 얘기를 한번 나눠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근수가 다시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마도 내가 근수 집으로 찾아갈 수도 있을 테지. 송이가 내게 그러했듯이.


  “너희들 오늘 치킨 먹으러 와. 우리 가게에 새 메뉴 나왔는데 엄청 맛있어.”


  진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치킨 홍보에 열성적이었다.


  “진호 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영업하네. 진호 너, 나중에 훌륭한 사장님 되겠다. 근데 어쩌지, 난 요즘 비싼 장비 사느라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야 해. 거지 신세거든.”


  “장비, 무슨 장비?”


  “그런 게 있어. 그럼, 난 볼 일 끝났으니까, 바빠서 먼저 간다.”


  송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진호를 뒤로하고 쌩하니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 밖으로 사라지는 송이의 뒷모습을 좇으며 송이가 내게 던진 ‘남다른 뒤태’라는 표현을 곱씹어 봤다. ‘거지 신세’와 송이의 뒷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또다시 픽, 웃음이 삐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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