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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10. 2024

#26 추억의 토끼굴에서

  근수는 겨울 방학식을 하는 날까지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근수의 근황이 궁금했던 나는, 근수에게 문자를 보내볼까, 생각하다가 근수의 번호가 내 핸드폰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이 근수가 이사를 간 것 같지는 않아 집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럴 자신이 쉽사리 서질 않아 고민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근수가 다시 편의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근수는 조금 야윈 모습이었다. 자퇴를 결심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일까? 편의점으로 들어온 근수는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냉장고 쪽으로 향하더니, 예전처럼 맥주 두 캔을 집어와 계산대 위에 슬그머니 올리며 그제야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근수는 내게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미성년자한테는 술 안 판다고 말했을 텐데…?”

  “… 마지막이다.”


  들릴 듯 말 듯한 근수의 말을 못 들은 척, 나는 맥주캔을 냉큼 집어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야!”


  근수가 소리쳤지만, 평소에 비하면 '소리친다'라고 표현하기엔 다소 기운이 빠져 있는 목소리였다.


  “너, 나랑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 아니냐?”

  “아니, 나 술 사려고 온 건데?”

  

  이렇게 말하는 근수와 달리 근수의 얼굴은 내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자의 눈빛을, 거울 속에서 익히 봐 왔던, 낯설지 않은 표정을 나는 읽을 수 있었고 결국엔,


  “그래? 그럼, 나랑 얘기하면서 술도 마시자.”

라고 말하고야 말았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


  홉뜬 근수의 눈에 순간 반가운 기색이 스쳐갔다.


  “내일 저녁에 시간 되냐?”


  내가 물었다.


  “시간 된다면…?”


  근수가 되물었다.


  “내가 저것보다 더 센 술 가지고 갈 테니까 얘기 좀 해.”


  잠시 망설이며 서 있던 근수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무슨 술?”

  “소주면 되겠냐?”


  나는 냉장고 한편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고모의 초록병들을 떠올렸다. 한 병쯤 내가 슬쩍해도 별로 티 나지 않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어디서?”

  “내일 저녁 6시. 도서관 뒤편 토끼굴. 어때?”


  도서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놀이터에는 ‘토끼굴’이라고 불리는, 얼핏 봐서는 안이 잘 안 보이는 구조로 되어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중학교시절 난 근수와 함께 이곳에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모래밭 위에 작은 미끄럼틀과 테이블, 부모들이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길쭉한 돌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햇살 아래 놀던 아이들이 떠나고 어둠이 내리면, 숨어들어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하기 좋은 공간이다.


  “콜!”


  근수가 짧은 미소를 흘리며 역시나 ‘또 보자’는 말과 함께, 느긋한 발걸음으로 어둠을 향해 사라졌다. 사실 근수에게 함께 술을 마시자고 말을 뱉어놓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 자신과 할머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기에.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서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니 한 번만 봐 달라’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할머니에게 미리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다음 날, 고모가 집에 오자마자 나는 편의점에서 미리 챙겨 온 간단한 안주거리, 잔 두 개와 소주 한 병을 신문지로 돌돌 말아 가방에 챙겨 넣고, 오래간만에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영하의 기온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던 날이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도서관의 커다란 창들이 오렌지색 불빛을 환하게 뿜어내고 있었고, 도서관 앞뜰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별 하나를 인 채 반짝이며 서 있었다. 저녁 무렵 겨울의 놀이터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토끼굴 근처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근수였다. 내가 굴 안쪽으로 들어서자, 근수가 담배를 황급히 바닥으로 떨어뜨려 발로 불을 끄며 내 쪽을 살폈다. 내 인기척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습관적인 반응이었다. 내게도 제법 익숙한.


  “왔냐?”


  내 모습을 확인한 근수가, 안도하는 눈빛으로 알은체를 한 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가래침을 크게 한 번 뱉어냈다.


  “하던 일 계속하지 왜…?”

  “어차피 끄려던 참이었어. 모자 썼네. 웬일로?”

  “그냥….”

  “너 그러고 있으니까 중학교 때 모습 생각난다.”


  근수의 눈이, 아주 잠시, 그 시절을 향해 있는 듯 아련해 보였다.


  “술은?”


  근수가 내 가방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신문에 싸인 병과 잔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야, 이거 뭐냐? 존나 웃겨! 이러니까 우리 진짜 노숙자 같잖아?!”


  근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낄낄, 소리를 토해냈다.


  “나름 신경 쓴 건데, 네 얘기 듣고 보니 좀 그렇긴 하네.”


  웃음을 내뱉는 근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퍼져 나왔다.


  “새끼, 모범생 흉내 내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 크크크.”


  불과 하루 전 편의점에서 보였던 모습과 사뭇 달라 보이는 내 눈앞의 근수는, 마치 조금 전 해빙된 냉동인간처럼 어리둥절해 보이기도, 오랜 구속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마시는 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근수에게 말했지만, 사실 그건 나 자신과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근수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 뚜껑을 병에서 분리시켰다. 내가 마른 안주거리를 신문지 위에 펼쳐 보이자 근수가 엄지를 추켜올렸다. 중학교 시절 수십 번도 더 봤던 근수의 엄지척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동안 새하얀 입김이 근수와 내 입에서 번갈아 빠져나왔다.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입김은, 토끼굴에서 근수와 함께 담배를 나눠 피던 순간들을 소환했는데, 몇 년 전의 그 장면과 지금의 풍경이 닮은 듯하면서도 또 극명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너 진짜 자퇴했냐?”


  내가 물었다.


  “들었냐? 소문 빠르네.”

  “학교가 원래 그렇잖아.”

  “아직 한 건 아니고….”

  “그럼?”

  “무단결석하다가, 지금은 그 뭐냐, 학업숙려? 그거 중이다.”


  근수가 별빛이 점점이 비치는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자퇴, 하지 마라.”

  “이 새끼, 또 이래라저래라네?!”


  거칠게 튀어나오는 말과는 달리 근수의 눈이 내 표정을 부드럽게 살폈다.


  “뭐 하고 지냈냐?”


  얼마 만에 물어본 근수의 안부였을까. 아마도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이었지 않을까.


  “궁금하냐?”


  근수의 얼굴에 당황한 듯 반가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이 새끼야.”

  “뭐… 자다가, 배고프면 먹고, 그러다 심심하면 피시방 가고, 기분 엿 같아지면 담배 피우고, 꼴리면 딸도 좀 치고… 요즘은 가끔 상담이란 것도 받으러 간다.”


  근수가 삶을 해탈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상담?”

  “그런 거 있어. 숙려기간 동안 필수로 받으라는데, 상담받으러 갈 때마다 내가 완전한 낙오자가 된 기분이야. 내 마음이 삐딱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근수가 말끝에 짧고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자퇴하지 마라. 그래도 학교 다니면서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냐? 방구석에 처박혀서 손 닳도록 딸이나 치고 있지 말고, 새꺄. 존나 한심해 보이니까.”

  “새끼, 꼭, 방구석에서 딸 안 쳐본 사람처럼 말한다?”

  “응, 안 쳐봤어. 손 닳도록은….”


  근수가 나를 보며 기가 차다는 표정 위로 헛웃음을 얹어 보였다.


  “학교는 왜 안 나온 거냐?”

  “… 그냥. 학교 가는 내가 한심해서.”


 ‘한심’하다는 근수의 말에 진호와 함께 했던 바닷가의 아침이, 그날의 내 마음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야?”


  내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던 근수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애들이랑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 엄마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라고… 그날따라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더라. 그 사람 죽여버리고 나도 그냥 감방이나 갈까 싶었어. 나 같은 놈 학교 다녀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고….”


  비밀로 간직할 법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던져 놓는 근수 앞에서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미운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마치 그가 내 인생에 없는 사람처럼 여기려 애쓰며 사는 것과, 죽도록 미운 감정을 견뎌내며 함께 사는 인생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일까. 왜 나는 근수처럼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날은 내 생각과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나온 자리가 아니었기에 나는 근수의 말에 집중하고 싶었다. 언제 또 이런 자리가, 기회가 내게 주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부모 때문에 니 인생까지 망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나 같은 놈도 학교 잘 다니고 있잖아…?”


  근수가 잠시 나를 돌아보더니 말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나는 그런 근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또 다른 말을 불러들이고, 그 말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저절로,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이날이 그랬다.


  “혹시 말이야… 답답하고 얘기 나눌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해. 내 번호 줄 테니까.”

  “사람 가지고 장난치냐? 실컷 두들겨 팰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얘기 나눌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미안하다. 미안해서 그런다. 너 보면 좀…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차마 말이 되지 못한, 감추고 싶었던 나의 진심이었다.


  “새끼….”


  근수가 가만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띤 채 손에 쥔 잔을 말끔히 비웠다. 그런 근수를 바라보며 나도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삼켰다.


  그날따라 하늘에 별빛이 소복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 불빛인지, 별빛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빛들이 싸늘한 대기를 데워주고 있었다. 살갗을 에이던 추위가 어느새 물러나가고 우리 주변으로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은은한 빛에 젖어든 하늘이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렸다.


  우리는 옛 추억을 나누며 한숨을 내쉬다가 이따금 미친 사람들처럼 소리 높여 웃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웃음소리를 따라 저 멀리 실려 나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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