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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17. 2024

#28 우리들의 데이트

  2월 12일, 날씨: 송이와 손잡고 걷기 좋은 날     


  첫 키스를 나눈 이후 송이와 나는 매일 만난다. 송이를 매일 보지 않았던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함께 미야를 데리러 가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영화를 감상하고 도서관에 가서 서로 책을 골라 준다. 이제 나는 송이가 좋아하는 가슴 절절한 사랑 노래를 송이와 함께 듣는다. 송이와 손을 꼭 잡은 채 거리를 걸으며, 송이의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송이와 나란히 앉아, 해맑게 웃음 짓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맛난 길거리 음식을 송이와 나눠 먹는다. 우리는 햇살 가득한 오후, 어둠이 깊은 노래방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앉아,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노래에 오직 우리 둘만의 목소리를 실어 사랑을 얘기한다.


  문득 송이와 처음으로 손을 꼭 맞잡았을 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 저릿했던 느낌이 떠오른다. 마치 송이의 손과 내 손이 음과 양, 강렬한 전기의 양극이 된 것 같았다. 송이는 정말로 자신이 원할 때마다 내게 키스하고, 때때로 간절해지는 담배를 향한 내 욕구를 멈추게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송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송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가 모르는 송이의 어린 시절이, 송이의 상처가, 송이의 생각이 그리고 송이의 몸이….


  이따금씩 나 스스로도 놀라곤 한다. 이토록 순식간에, 마치 쓰나미가 몰려오듯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들이닥치고 나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송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내어 줄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어루만져줄 때 전해지는 치유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준 송이에게. 어쩌면 앞으로 송이와 내가 더 깊은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아니지만, 아직은….     




  송이와 함께하는 첫 밸런타인데이가 돌아왔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밸런타인데이가 뭔가 의미 있는 날처럼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시내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다 말고 송이가 내게 리본으로 장식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빨간 바탕에 초록 리본이 어우러진,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키는 상자였다.


  “이게 뭐야?”


  내가 물었다.


  “네게 주는 내 첫 선물.”

  “아, 밸런타인…?”

  “꼭 그렇다기보다는, 내 말 잘 들어주는 기특한 내 남친한테 주는 하사품이지.”


  송이가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나는 선물 준비 못했는데….”

  “바보야, 밸런타인데이엔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거야.”

  “아, 그럼 나는 화이트데이 때 줄게.”

  “사탕은 사양할게.”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지.”


  송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 그렇지.”


  여자친구가 생기니 생각할 것이 참 많아지는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송이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고심하면서. 상자 속에는 상자만큼이나 새빨간 스웨터가 들어있었다. 고민했지만, 나는 결국 별다른 표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마워. 예쁘다!”

  “그게, 끝이야?”

  “그럼…?”

  “아니다. 내가 뭘 기대한 거야, 쯧. 매일 칙칙한 옷만 입지 말고 이제 화사한 옷도 좀 입고 그래. 여친도 생겼으니까. 집에 가서 입고 인증샷 꼭 보내. 오늘 열 시까지. 늦으면, 알지?!”


  송이가 앙증맞게 꽉 쥔 주먹을 내 눈앞에 들어 올려 보였다. 내게는 절대 주먹 쥐지 말라던 송이가,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주먹을 내민다.


  “응, 알겠어. 누구 명령인데!”


  사실 많이 좋았다. 그래서 더 표현하기 힘들었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건네받고,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더욱 설레고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내게도 하나하나 쌓여간다면 나도 내 마음을, 내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에서 맞는 마지막 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3월이 가까워올수록 아이들의 표정은 점점 비장해져 갔다. 아이들은 고3 한 해가 마치 천국에 입장하는 티켓을 구하는 시기인 것처럼, 곧 세상의 끝이 다가올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고3 시절이 내 삶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중간기착지처럼 느껴진다. 나는 일 년이란 짧은 시간에, 할머니 쌀통의 쌀알만큼이나 많이 남아있을 내 인생의 날들을 건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그때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놓치지 않으며 천천히 가보고 싶다.


  가야 할 방향은 잃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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