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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23. 2024

#29 영화가 불러일으킨 상상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자 내 통장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다달이 나오는 양육보조금이 있는 나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와 집, 편의점을 오가는 바쁜 일상에서 돈 쓸 일이 별로 없기도 했고. 진호와 달리 나는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에, 틈만 나면 어두운 곳으로 내달리려는 생각을 고단한 몸이 붙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돈이 불어날수록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더 강하게 움텄다. 꾸준히 모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든 해보라고 말하는 걸까? 국어시간에 들었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 진호의 말이 비행운처럼 자꾸만 머리 위로 부상하던 것이. 나는 결국 겨울방학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진호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진호 너, 베트남 언제 가…?”

  “왜, 신우 같이 갈 거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던지 진호가 반가움이 깃든 놀란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런데, 비행기표 비싸지 않아?”


  턱밑까지 올라오려던 '진짜 같이 가?'라는 물음을 삼키고, 나는 에둘러 진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돈 부족하면 내가 보태줄게. 걱정 마.”


  잘 나가는 치킨집 사장이라도 된 듯한 진호의 말투였다.


  “야 인마, 내가 거지냐, 니가 왜 돈을 보태?!”


  말을 해놓고 보니, 언젠가 진호에게 ‘비행기표를 사주면 베트남에 같이 가겠다’라고 농담처럼 얘기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보다 거지 아니야? 나 그동안 돈 많~이 모았어. 내가 얼마 있는지 말하면 아마, 신우 깜짝 놀랄걸?"


  이번에는 마치 돈 많은 동네형이라도 되는 듯 진호가 으스댔다. 왠지 모르겠지만 진호도 걸핏하면 내게 형처럼 굴려고 든다. 송이가 누나 행세하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는 내가 훨씬 큰데, 나의 어떤 면이 진호에게 동생처럼 비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여 진호도 송이처럼 내게 측은지심을 느껴서 이러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실제로 나보다 한 살 위인 진호가 그 사실을 늘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 한 살 많은 것이 마치 빛나는 계급장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던 어떤 형들처럼 말이다. 송이와 진호는 함께 있으면 곧잘 아웅다웅하지만, 어떤 때 보면 서로 꽤나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을 전해준다면 송이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며 눈을 치뜨고서는 내게 면박줄 게 분명하지만.


  진호는 비행기표 예매를 본인에게 맡겨달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는데, 그런 진호는 어쩐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면서 진호는 내게 베트남에 가기 전 미리 베트남에 관한 공부를 좀 해 두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베트남행 비행기표값을 물어봤을 뿐인데 부지불식간에 나는 진호와 베트남을 함께 가는 것으로 약속을 한 셈이 돼버렸다. 그것도 고3을 눈앞에 두고서.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에 함께 가자는 진호의 말은 내게 별로 와닿지 않았었다. 한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속으로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이제쯤이면 잊었을까 싶은 순간마다, 진호의 제안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진호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그날에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콜이 내리고 있는 열대우림의 사진을 보며 진호가 내게 말을 건네던 그 순간부터….


  진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내 마음이 점점 더 움직였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호와 내가 함께 베트남으로 향하는 장면은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의 사실처럼 느껴졌다. 고민은 짧지 않았지만 결정은 이렇듯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가겠다는 마음이 이미 배경화면처럼 깔려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말처럼 결정은 빠를수록 좋은 것인가 보다. 결심이 서고 나자 후련한 마음이 들었고, 이후의 과정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돈을 모으고,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방문할 장소들과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정하는 그 모든 것들이. 비행기에 내 몸을 싣게 될 생각을 하면 일상의 고단함이 여느 때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번뜩 들며 손이 민첩해지고 몸에 힘이 실렸다. 힘들여 버는 알바비지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에 즐겁게 쓰일 거라는 믿음이 나를 그리 만들었던 듯하다.


  진호를 만나기 전에는 ‘베트남 전쟁’, ‘결혼 이민’, ‘호찌민’, ‘더운 날씨’ 등으로만 베트남을 떠올렸다. 그러나 진호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베트남이란 한 국가에 대해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고, 내 머릿속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베트남이 자리 잡아갔다. 베트남은 진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우리나라만큼이나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사람들과 문화가 다르며, 유교 사상이 강하게 스며들어있는 곳이었고, 베트남인들 또한 우리처럼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어쩌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베트남이 나와 가까운 나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베트남에 관해 이것저것 찾아보던 어느 날, 나는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관련 영화들을 검색해 보았다. 베트남이 등장하는 영상들이 제법 많았는데,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 관련 이미지 중 유독 흑백 포스터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포스터에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소녀가 무심한 듯 우수 어린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인’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왠지 소녀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던 나는, 인터넷에 있는 영화 소개 동영상들을 찾아보다가 결국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


  문제는 ‘연인’이, 주인공들의 모습에 본디 내가 집중하고자 했던 영화의 배경이 가리어져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19금 영화였다는 것, 생각했던 이상으로 관능적이고 야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본 그날 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오르던 영화 속 장면들이, 하지 말았어야 할 상상을 끝도 없이 뻗어나가게 했고, 나는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역시나 그다음 날 나를 찾아왔다. 피곤에 전 얼굴로 송이와 눈이 마주칠 때면 나는 불쑥불쑥 얼굴이 화끈거렸고, 때로는 내가 송이를 상대로 죄를 짓는 느낌마저 들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송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유난히 빤히 쳐다봤는데, 그 모습에 영상 속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여 나는 송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많고 많은 영상들 중 하필이면 나는 이 영화에 끌려서는, 보고 싶은 마음 하나 참아내지 못하고 이런 난처한 상황을 자초한 것일까!

  이게 다 포스터 속 소녀의 모습 때문이다. 묘하게 송이를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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