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뉴 Nov 24. 2024

#30 우리가 저 높이 날아오른다면

  베트남으로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들뜬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가벼운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영어 시간에 배웠던 표현처럼 나비들이 뱃속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행기가 향하고 있을 목적지를 궁금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수많은 날들 엄마를 만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식적 성인이 되기 전 내가 비행기를 타게 되리라고는. 더군다나 내 첫 목적지가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는. 수업 시간에 이나 선생님이 했던 말처럼,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볼 만한 것인가 보다.


  진호와 내가 탈 베트남행 비행기는 오전 열 시 출발이었다. 우리는 아침을 거르고 서둘러 준비해 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쯤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가겠다며 큰소리치던 송이는 늦잠을 잤다며 이번에는 마중을 못 나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이라니? 다음은 없을 텐데?” 내가 놀리듯 말하자,


  “다음엔 나랑 같이 놀러 가야지, 하와이로?!”라고 송이가 장난스럽게 대꾸했고, 나는 뱃속에 비단나비 열 마리쯤 품고 있는 사람처럼 설렜지만,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손을 꼭 맞잡고 태평양의 바람을 맞으며 와이키키 해변을 걷는 우리를, 이국의 달빛이 어른거리는 하와이의 거리 이슥한 곳 어디에선가 짜릿한 입맞춤을 나누는 우리를, 어느 순간엔 그 이상을 상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송이 말처럼 내 안에 늑대가 살고 있나 보다. 송이가 눈앞에 있었다면 흔들리는 내 눈빛을 알아차렸을 것 같다. 송이가 늦잠을 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은 방학을 맞은 학생과 가족, 신혼부부, 연인과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청사 안에 들어서자 바다 건너로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송이와 진호, 나 셋이서 자전거를 끌고 왔던 기억도 새록새록 소환됐다. 나는 송이가 선물로 준 빨간 스웨터를 점퍼 안에 받쳐 입고 송이가 빌려준 여행가방을 끌었다. 여행가방은 군데군데 얼룩덜룩한 무늬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내게 빌려주느라 송이가 캐릭터 스티커들을 굳이 떼어 내고 남은 자국들이었다. 스티커를 없앴음에도 조금 여성스러워 보이는 가방 때문에 새 가방을 살 걸 그랬나,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송이의 가방은 내가 입고 온 빨간 스웨터와 꽤 어울려 보였다. 가방도, 스웨터도 송이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 그런지, 내게는 곁에 없는 송이를 대신해 주는 송이의 분신과도 같이 느껴졌다.


  “신우 너 빨간색 잘 어울린다! 그런 색 입는 거 처음 봐.”


  이토록 선명한 빛깔의 옷을 입은 나를 처음 봤을 진호가 옅은 감탄을 섞어 한마디 건넸다.


  “송이한테 받은 선물이야.”

  “너희들, 진짜 사겨?”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호는 “축하한다!”라고 말하며 내가 해석해 내기 힘든, 알쏭달쏭한 표정을 내보였다.


  “베트남 지금 더워서 베트남 도착하면 여름옷으로 바로 바꿔 입어야 해. 내가 말한 물건들 다 챙겨 온 거 맞지? …그리고….”


  진호는 처음 해외로 나가는, 아니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내가 신경 쓰여서인지 이것저것 세심히 챙겼다. 그 순간의 진호는 어설픈 동생에게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티켓팅을 마친 뒤 출국장 근처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웠다. 그러고도 시간이 여유로워 몇 달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터미널 안을 한 바퀴 돌았다. 터미널 이층을 지날 때 공항우체국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자 예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하지만 언제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이 생각났다. 진호와 함께 우체국으로 들어가 하얀 봉투 하나를 구입했다. 때마침 진호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가방에 들어있던 연습장 한 장을 반듯하게 찢어낸 뒤, 펜을 들고 천천히 시작해 빠르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신이나 선생님,

  저 신우입니다. 방학은 즐겁게 잘 보내고 계신가요? 죄송해요. 이제야 선생님께 답장을 보내게 되네요.

  전 태어나 두 번째로 공항에 왔어요. (이 편지는 공항우체국에서 적고 있어요. 손 편지를 적는 건 진짜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제 편지를 받고 선생님이 놀라실지도 모르겠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설레는 마음에 공항에 너무 일찍 와버려서 시간이 남기도 하고요. ㅎㅎ


  공항은 올 때마다 사람들로 붐벼요. 이곳에 오기 전엔 몰랐어요. 세상에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요. 저도 오랜 시간 어디론가 가고 싶은 소망을 품고 살았어요. 하와이로요. 선생님은 혹시 그곳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하와이에 가보고 싶은 이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가 사라졌어요. 그래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려고요.


  지금 전 진호와 함께 있어요. 진호의 고향으로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그동안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어요—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열대우림 가득한 베트남에서 ‘스콜’을 경험해보려 해요. 안 좋은 생각과 마음을 그곳에서 말끔히 씻어버리고 오려고요. 지금 그곳은 건기라서 스콜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살만한 거라고 한 선생님의 말씀처럼, 예상치 못한 행운이 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겨보려고요.


  오늘 제 눈앞엔 태어나서 보는 가장 예쁜 하늘이 펼쳐져 있어요. 각양각색의 무늬를 입은 비행기들이 제각각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있네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는 사람들 꿈도 비행기 모습만큼이나 다양하겠지요. 그 생각을 하는데 문득 선생님이 제게 하셨던 질문이 떠올랐어요.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죠, 제 꿈이 뭐냐고. 그땐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어른들은 제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네 꿈이 뭐냐’라고 물어봐요. 선생님도 어른이시니까, 제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궁금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전 아직 제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고, 앞으로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는 알고 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래서 마음먹었어요. 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 보려고요. 쉽진 않겠지만요.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내일이, 그다음이 기대돼요.


  이상하게 한 번씩 생각이 나요. 학폭위가 열렸던 날에 본 선생님의 눈물이요. 눈물이 흘러내린 것도 아니었고, 그냥 선생님 눈가에 살짝 맺혔을 뿐이었는데, 너무 낯설었는데, 어쩐지 위로가 되었어요.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더 이상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거요. 할머니 생각에 마음 아픈 순간들이 있지만,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며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에, 저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제게 용기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제가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고, 제가 쓴 글에서 그런 힘이 느껴진다고 하셨죠. 선생님 편지를 읽으며 새삼 느꼈어요. 때로는 열 마디 말보다 진심 어린 글 한 줄에 지친 마음을 일으킬 큰 힘이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 앞으로도 용기 잃지 않고 계속 글을 써보려고요.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그 끝이 어디에 가 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해요.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도 여전히 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죠? 선생님의 꿈을 향한 마음은 ‘현재진행형’ 이니, 선생님의 마음은 절대 나이 들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겉모습도 완전 젊으시지만요. ^^


  선생님이 하시고 싶은 것들로 채워나가는 순간들이, 선생님 이름만큼이나 설레고 신나는 일들로 가득한 날들을 선물해 주길 기원할게요. 국어선생님께 편지를 쓰려니 조금 부담되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용기 내 적어봅니다.


  쓰다 보니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럼, 저 이제 그만 가볼게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신우 드림

추신 - 급하게 쓰느라 글씨가 엉망으로 춤을 추네요.ㅠ  참, 고3이 되면 노력해 보려고요. ‘이나쌤’이라고 부르는 거요. ^^



  내 생애 비행기를 처음 탄 그날, 처음으로 공항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쳤다. 긴장되면서도, 이제야 내가 해야 할 일 하나를 완수했다는 흐뭇한 마음이 일던 순간,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송이…?”


  진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어른이야. 고마운 사람….”     


  우체국을 돌아서 나오는 길, 불현듯 예감 같은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윽고 떠올랐다.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또 한 명의 사람이. 그러자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예감이 하나의 장면으로 구체화되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내가 그에게 전할 글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모습이.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내가 그와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 이 세상엔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출국수속을 마친 후, 자꾸만 위로 떠오르려는 마음을 보듬어 안고 탑승구 근처로 들어서자, 전면 유리창 밖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 한가운데, 하트모양을 닮은 구름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