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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그레 May 10. 2019

05. 결혼예정일에 식장 대신 나홀로 여행을 떠나다

일단 멈춰서도 괜찮아

 다시 일상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면, 내게 2019년 4월은 숨 막히도록 우울했고, 때때로 죽은 듯한 방 공기에 친구들이 찾아와 숨을 불어넣어 주고 갔다. 유전적으로 소화기관이 약한 탓에 과음하면 다음 날 숙취로 끙끙 앓는 데다 피부까지 민감해져서 줄였던 술이지만, 이 달에는 술도 조금 더 자주 마셨다. 파혼 이후 처음 만난 친구들은 다들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매일 생각나는 그 사람의 이름과 조각나버린 기억의 파편들로 인해 괴로웠고, 내가 이렇게 멈춰서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멀쩡히 사업장에 나가 매출을 올리고 있겠지 생각하면 너무 분했다. 결혼이 보장해주었던 안정적인 삶보다 지금의 자유와 깨달음이 훨씬 가치 있다는 건 알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흘러가진 않더라.


 어쨌든 그렇게 4월 말이 다가왔고, 나는 결혼 예정일이었던 날에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여행 후보지는 홍콩(+마카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 제주도, 전남 구례. 홍콩은 내가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가본 곳이라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기에 좋을 것 같았지만, 현시점에서 여행 비용이 조금 부담이 돼서 탈락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예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구 소련의 느낌이 강해서일까 러시아에 혼자 간다는 게 망설여져서 탈락. 숙소 퀄리티와 언어 장벽도 한몫했다. 그래서 남은 게 제주도와 전남 구례였는데 결국에는 둘 다 가기로 결심했다. 다만, 제주도는 결혼 예정일(=토요일)에는 항공권 가격이 너무 높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유로 5월 평일로 발권을 하게 되었다.


 “구례? 그거 어디 있는 거야? 전라도인가? 거기 가서 뭐했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구례에 간다고 하니 대부분 이런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서울이나 경기권에 살면서 전라남도 구례까지 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살지 않는 이상, 굳이 단일 여행지로는 선택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 곳인 것 같다. 그런 곳에 내가 떠나기로 한 이유는 단순히 예전부터 눈독 들여온 게스트 하우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났던 통영 여행에서 만난 동생이 자신 있게 추천해준 그 숙소는 주인집과 손님 집이 나란히 있는 소규모 게스트 하우스였다. 손님 집에는 더블룸, 싱글룸, 2인 도미토리룸이 있어 최대 수용 가능한 인원은 5명 남짓. 사람 많고 번잡한 곳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다거나 집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것보다는 지쳐있는 마음을 달래기에 적합한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3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가는 동안 점차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졌고, 유명한 산수유 축제도 얼마 전 끝난 뒤라 시내에 관광객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서울이었다면 불금이라며 어딜 가든 북적북적했을 저녁 시간, 날은 흐렸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터미널에서 십오 분쯤 걸었을까, ‘응? 여기야?’ 싶은 골목길에 위치한 숙소는 작지만 아늑했고, 죽어 있는 공간 없이 하나하나 주인 부부의 손길이 닿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골목골목 길이 헷갈릴 수 있다며 건네어 주신 동네 지도에는 맛집과 가볼 만한 곳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싱글룸에 짐을 내려놓고, 더 어두워지기 전 향한 곳은 5일 시장에 위치한 수구레 국밥집. 장날은 아니었지만 식당은 매일 연다고 해서 갔다. 수구레는 소의 가죽에서 떼어낸 지방육으로, 소의 가죽 껍질과 고기 사이의 아교질을 일컫는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생소한 음식이라 반은 두렵고 반은 설레는 마음으로 수저를 뜨는데, 옆 테이블의 나이 든 인부 아저씨와 식당 아줌마(직원 분)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대화와 쌓여가는 밥공기. 서너 공기는 더 드신 것 같은데 돈은 더 받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곳들은 추가할 때마다 돈을 받지만, 여기는 식사를 주문했다면 밥이 몇 공기가 되든 추가금은 받지 않으신다고. 서울이라면 정말 생각도 할 수 없는 인심이었다. 강남의 어느 식당은 밥 한 공기에 이천 원 받는 곳도 봤는데……. 주인 할머니는 대화에 많이 참여는 안 하지만 가만히 들으면서 비스듬히 서 계시는데 그 모습도 정감 있고 참 좋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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