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행복에 관한 단편소설
“다자이 오사무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처럼 살려면 반드시 다자이 오사무처럼 죽어야 한다. 연인과 강에서 동반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만을 빼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사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죽음까지 같아야 비로소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 죽어야 그렇게 살 수 있게 된다. 다자이의 영혼의 불꽃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여자와 강바닥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것, 그것이 그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깐 말이죠. 이런 부류의 유서가 발견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다자이 오사문지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살하는 사람이 구구절절 적는 유서에 저런 일본인 이름을 적다니... 글쎄요.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의 경우는 남아있는 가족에게 뭔가 미안한 마음을 얘기한다거나, 자식을 잘 키워달라거나, 누구 때문에 죽는다는 푸념 섞인 말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유서는 쓰다 보면 괜스레 울컥해지고, 읽는 사람이 나처럼 눈물을 흘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유서는 무언가 다릅니다. 짤막한 저 글을 읽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자살이라니. 요즘은 저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거든요. 일단은 처음 신고가 접수됐을 때도 풍덩하는 소리만 들렸다고 하니, 정말 동반자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둘이면 ‘풍덩풍덩’, 혼자면 ‘풍덩’이지만 동반자살이라면 둘이서도 ‘풍덩’일 테니깐요. 좌우간 다자이 오사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면 뭐라도 조금 알게 될지 싶다는 게 형사의 촉입니다. 일단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수사란 것이 사실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촉을 믿는 거죠. 촉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직감, 촉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말로 ‘빅 데이터’라고 할까요. 나침반 바늘이 자연히 북쪽을 향하듯 몇십 년간 제 뇌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들이 범인이나 진실 같은 곳으로 저를 이끄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메일을 당신께 쓰는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특이한 이름을 검색하다 인터넷에 적은 당신의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작가의 대단한 팬인 거 같았거든요. 요즘 말로는 오타쿠라고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저에게 소상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범인을 잡게 되면 수사에 공로한 대가로 약간의 보상금도 입금될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되면 또 안내드릴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보다도 세상의 정의에 보탬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보통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좀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렇게나 특이한 유서는 단언컨대 처음이니깐요.
자신을 형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메일을 받았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글을 언젠가 인터넷에 투고한 적이 있는데, 그냥 인간실격을 읽고 꽤나 재미있구나 싶어서 별생각 없이 쓴 글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그 작가에 대한 전문가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마 저 형사도 그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만 이렇게 아무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 나를 골랐을 것이다. 일본 문학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려면 그들만의 어떤 ‘절차’ 같은 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그런 절차랄 것도 필요 없는 부류니까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세상의 정의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나는 저 허무맹랑하면서 중2병스러운 유서에 흥미가 생겼다. 다자이 오사무는 분명 동반 자살을 했다, 몇 번 실패했지만 마지막엔 결국은 성공시켰다. 마치 그에게 동반자살은 삶의 목표라도 되는 양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죽어버린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뭔가 우울에 가득 차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투신을 할 것 같은데,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했을 때는 뭔가 체념이나 우울 같은 마음보다는 일종의 각오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노력해서 죽는’ 모습 말이다. 어쩐지 저 유언장에서도 그런 결의가 느껴졌다. 언젠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으레 겪는 어려운 일들이 겹치자 그냥 확 뛰어내리면 이런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려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이란 건 지금껏 보던 것, 볼 수 있던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할 수 있던 것과 할 수 있을지도 것들을 모두 스스로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다리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면 되는 일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스스로 눈을 파고 팔과 다리를 자르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에 관한 몇 가지 알고 있는 점들을 이야기했다. 그가 연인과 몇 번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 걔 중 몇 번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은 성공을 했다는 점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책 중에 인간실격이란 책이 있는데 거기엔 그의 삶이 잘 녹아있는데 읽을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 조금 설명하자면 그 남자는 아주 무뢰배 같은 남자여서 여색과 술을 밝혔고, 마약을 하다가 말년에는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했다는 점도 말이다. 적어놓고 보니 꼭 남을 험담하는 글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퇴폐적인 남자에게 끊임없이 여자가 따르고, 술과 마약에 빠져있지만 자신만의 개똥철학으로 멋진 문장들을 턱턱 써내는 것이 부러웠던 적이 더 많다. 가끔은 인간은 경험한 것들만 진심으로 쓸 수 있으니 그런 글을 쓰려면 필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는가. 가히 명작이라고 부르는 글들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보통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글들은 어떤 대단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전쟁이나 역병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대단히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만이 명작이라고 칭송받는 글을 쓸 수 있다. 오늘날 출판되는 소설들은 그런 것들에 비해서 아주 사소하고도 작은 고통을 가지고 마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인 양 써대는 것에 나는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발라드 가수도 마찬가지다.) 가령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랑이 줄 수 있는 아픔이 전쟁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는 아픔과 비교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랑과 관련된 것들을 가지고 대작을 만들겠다는 것은 송사리로 회를 떠서 먹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치만 나는 그런 사랑조차 쓸 수 없고 그저 대학 입시에서 겪은 스트레스나, 스무 살에 앓았던 안면마비라든지, 할머니의 죽음 같은 것밖에 써낼 수 없는 삼류 작가가 되는 것이 고작이다. 아마 저 유언을 쓴 작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리하자면, 작가이면서 술과 여색을 밝히고 마약을 하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그런 남자 말이다.
역시나 제 감이 맞았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사건이 거의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자칭 다자이 오사무라는 놈 말이죠. 동반자살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유언이 발견된 곳에서 시체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한참 떨어진 데에서 웬 여자의 시체만 발견됐어요. 그래서 분명히 이놈, 자살에 실패하는 것까지 따라 하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다리란 다리는 샅샅이 뒤졌는데 CCTV하나 없지 뭐예요. 그런데 말이죠. 역시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의 블랙박스에 그 남자가 찍혔습니다. 여자와 같이 다리 난간에 서서 잠깐 있더니 여자를 툭 밀어버리지 뭡니까. 그리고는 유서만 두고 유유히 떠났습니다. 아주 악질적인 녀석이죠. 이제는 자살사건에서 명백한 살인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실격이란 책도 다는 못 읽어 보았지만 내용은 대충 봤습니다. 아마 이 내용대로 앞으로 일을 벌일 것이다는 당신의 감도 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분명 감이 좋은 사람이군요. 아마 저 여자의 연락처 목록만 파도 금방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놈 잡히는 건 시간문제란 말이죠. 하지만 당부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갖기 좋습니다. 이 관심이란 게 보통은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자 놈들이 달라붙으면 수사에도 차질이 생기고, 사실은 이 전화통에 불이 나서 영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왜 죽였냐 어떻게 죽였냐 어느 대학을 다니고 평소에 무슨 인터넷 활동을 했냐 까지. 범인을 형사가 수사한다면 형사는 기자가 수사를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걸 아주 불편해한답니다. 그러니깐, 당분간은 이 사건에 대한 얘기는 혼자만 알고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은 제가 감사한 마음에서 그간의 진척을 말해드린 것이지 당사자가 아니라 얘기해 줄 의무란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도움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쪼록 당분간은 절대 비밀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살인 사건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부분을 몇 번이나 읽었다. 죽기로 결심해서 난간에 선 사람을 미는 것은 살인인가. 오히려 자살 방조에 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죽기로 결심했는지, 아니면 실제로 죽을 생각은 없었는지, 죽으려고 했다가 강바닥에 얼굴을 처박기 직전에 다시 살기로 바꿨는지는 죽은 사람만 알기 때문에, 살인이라고 해둔 것 같다. 사실 이런 법리적인 판단은 판사가 해야겠지. 예전에 법에 대해 잠깐 배울 때, 경찰이 조사하는 사람은 ‘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제아무리 블랙박스에 여자를 툭 미는 모습이 찍혔다고 해도 그것을 범인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죄를 짓는 모습을 똑똑히 봤는데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라니 말이다. 뭐가 됐든 간에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은 무죄다. 순결한 사람이며, 손가락질할 수 없다. 그러면 그런 판결 전에 죽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는 것일까. 죄를 짓지 않고 그저 사람을 죽인 사람? 웃기는 소리다. 어쨌든 간에 소동은 이렇게 마무리될 것 같다. 어쩐지 찝찝한 결말이다. 뭔가 결의에 차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반자살을 연기하려 여자를 밀어버리는 비겁한 인간이었다니 말이다. 그런 건 다자이고 뭐고 아니라 겁쟁이에 불과하다. 자신의 그런 겁쟁이 같은 면모를 가지고 어디 방구석에 숨어 글이라도 쓰고 있을 것이다. 거기엔 또 다자이를 따라 하며 ‘부끄러움이 많은 생을 어쩌고’ 하며 자신의 평범한 삶을 아주 슬프게 과장하는 문학적 허위가 더해질 것이고, 또 어딘가에서 여자를 만나 술과 약으로 꼬셔 동반자살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수차례 음독자살을 자행한 바 있다. 이것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었으니 이걸 따라하려 집에서 혼자 치사량 직전의 수면제를 먹었을까. 정말이지 추하기 그지없다. 다음 투신자살은 이제 성공할 차례다. 진정 다자이 오사무처럼 죽고 싶은 것이라면 타마가와 상수로에서 내연녀와 투신자살을 해야겠지만, 아마 내연녀 같은 건 있을 턱이 없고, 일본까지 가서 죽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한강의 어느 다리에서 그저 마음 맞는 여자와 뛰어내릴 것이다. 자살을 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까맣게 잊은 채 그들이 남겨둔 작품들에 감탄을 하고, 요절한 예술가들에게 모종에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은 후에야 인정받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죽은 후에 인정받은 게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인정받는다는 감상이다. 예술에 대한 집념이나 숭고한 정신이 결국 인간의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 무척이나 예술적이고 낭만적이다. 마치 그만한 작품을 내려면 응당 그만한 대가를 내놔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건의 저 녀석은 대가를 먼저 내놓는 바보라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별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도 주소도 전부 사라졌단 말입니다. 이놈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한 놈인 게 틀림없어요. 보통의 살인범들은 충동적이어서 바보 같은 면도 있고, 이 정도로 단서를 안 남기지 않거든요. 살인 사건인 만큼 저희들도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만... 얼마 있으면 분명 기자들도 떠들어 댈 겁니다. 제가 일전에 기자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요. 아무튼 불편한 작자들입니다. 제가 이렇게 다시 연락을 드린 이유는 다시 도움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 하긴 죄송합니다만 당신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보니 다자이 오사무같은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라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오해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범인이 작가 지망생이라고 추측하고 있거든요. 만에 하나라도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그 점은 제가 명백하게 해 두죠. 범인과 그래도 생각이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적어도 저희들은 이런 엽기적인 기행이 벌어지는 사건을 수사하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다들 책이나 작가 같은 것과는 담쌓고 살았으니깐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저희와는 다르겠죠.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라면, 혹은 다자이 오사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장소에, 누구와, 언제 또 살인을 저지를 것인지 생각나는 게 있다면 가감 없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담은 전혀 가지실 것 없습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런 놈들은 언제가 됐든 잡히기 마련이거든요. 그래도 기왕이면 더 빨리 잡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모로. 그럼 또 부탁합니다.
메일을 읽은 이후로 나는 습관적으로 뉴스를 보게 됐다. 뉴스에 웬만해서는 다자이 오사무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저 살인 사건이 보도가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형사의 마지막 메일의 답장으로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적었다. 아마 그 남자는 마약을 하고 있을 것이고, 음독자살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음독자살 기도로 구급대가 출동했던 기록이 있다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든지, 여성을 끌어드리는 미남자일 수 있으며, 유흥가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를 응원하는 것인지 형사를 응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사회의 정의 같은 건 상관없고 찌질한 작가지망생인 그가 죽음만이라도 제발 비굴하지 않게 해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소설은 대부분 우울하다. 그것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다. 소설가들이 전부 우울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우울한 소설을 늘 원해 왔기 때문에 간단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인지 알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민이 ‘자살’이라고 단정 지었다. ‘우리는 왜 사는가?’ 에 대해 묻기보다 ‘왜 죽지 않는가?’ 따위를 물어보는 것이다. 누구는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가니까’라고 라고 할지도 모른다. 챙겨야 할 자녀가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첫 번째 이유가 상실된다. 가족과 진즉에 연을 끊고 사는 나는 두 번째 이유마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죽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죽지 않는 이유는(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죽음이라는 누구에게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자산을 이렇게 허무하게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은 못해도 적어도 우스운, 아무런 가치 없는, 없는 이만 못한 죽음 같은 걸로 소중한 자산을 망칠 수 없기 때문인 게다. 죽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멋진 죽음이라면 할 법도 하다. 나는 그래서 요절한 예술가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동안의 그림을 담을 멋진 액자 같은 게 되어버린다. 그들의 재능을, 성과를, 죽음마저 부러웠다. 그래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일본의 무뢰파 작가들처럼 어둡고 꿉꿉하지만 죽음이라는 반전을 통해 글에서 묘한 긴장감과 결의 따위를 느끼게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겠지. 그러니 부디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놈 죽었습니다. 제대로 예상 적중이에요. 그놈 꽤 잘생긴 대학생이더군요. 클럽에서 약을 했던 적도 있는 거 같고, 요새 유행하는 마약도 종종 사서 해봤던 모양이에요. 서울 근교의 다리에서 여자친군지 어디서 만난 여자인지는 모를 사람이랑 투신했어요. 아마 마약도 했을 겁니다. 그거야 차차 부검을 해보면 알 수 있겠죠. 사건이 생각대로 흘러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워낙 엽기적인 경우다 보니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벌써 서에도 몇 번이나 기자가 다녀갔어요. 어쩌면 당신에게도 연락이 갈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들에게 ‘수사’당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일사천립니다. 사실 뭐 피의자가 죽어버렸으니 수사고 재판이고 금방 종결되겠죠. 정말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얼마나 그 다자이 오사무란 놈이 좋았으면 따라 죽느냐 이 말이에요. 이 형사란 걸 하다 보면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정말 질리도록 보는데, 처음에는 사람이 죽는 게 신기하다가도 나중엔 사람이 죽는 게 너무 뻔해져 버립니다. 죄다 돈 때문이죠. 돈 없어서 죽고, 돈 많다고 남이 죽이고, 물론 아주 딱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이번에 죽은 이놈은 말입니다. 집에도 돈이 꽤나 있던 놈인가 봐요. 부모님도 전에 사업을 꽤 크게 벌였던 사람에다가 지역 유지더군요. 하여튼 이런 사람이 자살이라니 뉴스거리긴 하죠. 아무튼 덕분에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용감한 시민상 같은 거라도 하나 챙겨드리려니깐 다음에 연락하면 한번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특별히 보내드리는 건데 이놈 마지막 유서 말이죠. 꽤 글을 잘 쓴 거 같아요. 저는 뭐 읽어도 잘 모르겠지만 글 쓰는 놈이라 그런지 어쩐지 착잡하면서 서늘한 기분이 드는 글이에요. 원래는 이런 증거물은 보여주면 안 되는데 당신은 이번 수사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니까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첨부해 뒀으니 나중에 한번 읽어보세요. 당신도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이만 마치겠습니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요. 누군가 당신은 언제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더 이상 나는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이란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것 같달까요. 행복이란 것도 사실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란 건 호르몬이 시키는 대로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는 것이니깐요. 그렇다면 저는 더 잘못된 인간입니다. 어려서는 여자에 빠져, 지금은 마약에 빠져 호르몬 따위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니 말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불행하진 않습니다. 길거리에 노숙자에 비해 제 삶은 풍족하고, 만족스러워 보일 테죠. 남이 보기엔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오히려 불행은, 행운의 반대말일 겁니다. 그럼 행복의 반대말은? 고독, 우울 등등을 떠올려 보았지만 시원치 않고, 생각은 어느덧 ‘죽음’에서 멈췄습니다. 행복은 삶을 이끄는 에너지고, 그것이 떨어져서 더 이상 채울 수 없다면 저는 죽은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죽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몇 년 전부터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겁쟁이인 저는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교실에서 매를 맞으러 선생님에게 다가가는 순간 기절했던 것, 엄한 아버지가 두려워 집을 나갔던 것, 여자가 두려워 연인 관계 같은 건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저는 겁쟁입니다. 그래서 죽음마저도 남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런 저에게 유일한 출구였습니다. 나와 같은 불행을 물고 태어나 죽어버린, 타국의 작가가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그 사람처럼 이라면 행복이 전소된 채로 불행하게 죽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라 했던 겁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겁쟁이는 아니었을 겁니다. 불행의 화신, 구원의 성모 그런 것입니다. 나는 겁쟁이로 태어나 놓고, 겁쟁이가 아닌 척 죽고 싶었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계획된 죽음보다도 더 가치 있는 죽음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나는 인간으로 낙제, 실격인 겁니다.”
인간으로 낙제, 실격. 분명 그는 이 말이 쓰고 싶어서 앞에 자신의 추함을 나타내는 두서없는 글을 적었을 것이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너무도 자명하게 이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오히려 그의 한계와 절망이 느껴져 동정이 들었다. 이것은 나와 정확하게 닮아있는 젊은 작가의 유작이다. 다자이 오사무와는 다르지만 말이다. 나는 뺨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분명 나는 눈물이 없다. 얼굴이 마비됐을 때도, 가족이 죽었을 때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는 무언가가 망가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눈물이 났다. 마치 나의 유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행복하지 않은 삶은 왜 이어 나가는가.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생각이지만, 선뜻 답을 내릴 수 없다. 이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겁쟁이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겁쟁이는 살아내야 한다. 죽는다는 것은 선택지에 넣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장에 행복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기대’ 행복할 수 있다는 아주 조금의 기대만 있다면, 마치 그것은 아주 작은 식의 미지수 x를 무한대로 보내는 일처럼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기대는 무한이고, 행복은 아주 작아도 상관없다. 아주 작은 행복의 기대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살아갈 수 있다. 서랍을 뒤져 빈 원고지에 ‘작은 행복’이라 적었다.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적어보기 위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용감한 시민상 때문은 아니지만은 말이죠. 물론 그것도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을 첫 번째로 추천할 겁니다. 다름이 아니고, 또 비슷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분명 뉴스에서 떠들어대니 누군가 모방 자살을 한 것 같아요. 사실 생각보다 자살하는 사람은 많거든요. ‘모방 자살일 것이다’는건 역시나 제 촉입니다. 형사의 직감. 전에도 봤듯이 적중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이번에는 남자 시신 하나만 수거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옷 안에는 마치 누가 발견해 주기라도 하는 듯하게 코팅된 원고지가 나왔습니다. 거기는 ‘작은 행복’이라고만 쓰여 있었다네요. 이번에는 다자이 오사무 팬은 아닌가 봅니다. 작은 행복이라, 이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냥 뭔가 당신은 이런 쪽에 촉이 좋으니깐, 작가다운 참신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저는 봐도 봐도 모르겠습니다. 가능하시면 이번에도 수사에 도움을 조금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사회 정의이기도 하고요. 하하 좌우간 요새는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메일을 주고받은 거도 벌써 여러 번인데, 이런 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언제 시간 되실 때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한번 저희 서에 놀러 오시죠. 경찰서가 놀러 오는 곳은 아니지만 재밌지 않습니까? 아무튼간에 잘 지내시다 뭐가 좀 생각나신다 싶으면 언제든 메일 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