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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ug 06. 2023

생애 첫 브라질, 겁 먹고 들어가 행복에 들뜨다

3월 상파울루와 리우는 천국…귀인부터 날씨까지 행운 겹쳐

30시간 무수면 비행 이어 상파울루 2만5천보 대장정


22리터 등산가방에 옷가지, 세면용품, 구급약품, 전자책, 노트북을 차곡차곡 때려 넣었다. 이과수 폭포와 이파네마 해변에서 물놀이할 때 갖고 다닐 방수가방도 챙겼다. 위탁 수하물은 없다. 1년 6개월 전 이베리아반도에서 100일간 여행할 때도 이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여행 다닐 때 짐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없으면 죽는 것 빼고 다 버리고 왔다. 3월 15일 오전 9시 40분 인천국제공항 1번 터미널에서 뉴욕행 아시아나항공을 탔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15시간을 날아 같은 날 오전 10시 40분 미국 뉴욕 JFK 공항 1번 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과 뉴욕 간 시차는 14시간이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전자책 단말기 크레마에 담았다. 평소 읽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읽기를 차일피일 늦추던 책들이다. 홍진채 저 <거인의 어깨>,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 빌 설리번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수 프리도 <니체의 삶: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진정한 삶>, 최준철 저 <한국형 가치투자>, 제임스 몬티어 <투자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중남미 7개국 여행지와 미국 소도시에 있는 카페에서 읽을 거다.


뉴욕 JFK공항 행 비행기에서 홍진채 저 <거인의 어깨>를 읽었다. 투자원론서에 불과한 책을 읽자니 따분하고 지루했다. 투자 천재라고 불리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졸저였다. 보다 지겨워 이내 덮고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을 열었다. 두 번째 읽는 거다. <거인의 어깨>보다 훨씬 낫다. 투자 칼럼리스트답게 글쓰기 능력에서 홍진채를 압도했다. 미래현금흐름의 현재가치 할인 같은 파이낸스 원론 수준의 기초 개념이나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투자 심리에 기초한 통찰력을 담아 내용이 충실하다. 오프라인으로 저장한 유튜브 스페인어 인강도 들었다. 햇수로 2년가량 꾸준히 듣다 보니 스페인어 실력이 중급까지 올라왔다. 속 깊은 얘기야 힘들겠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통은 가능한 수준이다. 어학이야 꾸준히 반복하면 된다. 나 같은 학습 지진아도 되더라.


뉴욕 JFK 공항에 오전 10시 30분 떨어졌다. 공항 내에서 오후 6시 30분까지 버텨야 한다. 맨해튼까지 다녀올 수 있겠지만 무리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1번 터미널에 있는 한식 코너 직지 옆에 자리 잡고 휴대전화 충전도 하고 칠면조 샐러드 랩을 먹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더디 가는 시간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시작했다. 뉴욕 JFK공항 4번 터미널에서 오후 6시 45분 라탐항공을 타고 3월 16일(목) 오전 5시 20분 상파울루 가루로스 아에로푸르토(Sao Paulo Guarulhos Aeroporto) 3번 터미널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상파울루까지는 비행 편으로 9시간 30분가량 걸렸다. 위탁수하물이 없다 보니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세관을 지나쳐 출구 쪽으로 나가는데 브라질 경찰이 나를 꼭 찍어 수하물 검사를 다시 받게 했다. 내 인상이 불순해 보이기는 브라질 경찰 눈에도 마찬가지 나보다. 세관 엑스레이 검사장비로 꼼꼼히 살피더니 가라는 말도 없이 방치하길래 “검사 마쳤냐? 그럼 나 짐 챙겨 나가도 되냐?”라고 스페인어로 물었더니 알아듣고 가란다. 포르투갈 인에게 스페인어는 우리로 치면 대충 제주도 사투리쯤 생각해도 된다. 대충 알아듣는다고 한다.


가룰루스 공항에서 우버를 타고 송하승과 만나기로 약속한 빵집으로 갔다. 쎄 성당 뒤쪽에 있는 브라질 빵집으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우버를 타고 쎄 성당 앞을 지났다. 쎄 성당은 노숙자와 부랑자 집단촌으로 전락했다. 상파울루에서 유서 깊은 곳인 쎄 성당에 혼자 가는 관광객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3015년에는 쎄 성당 앞에서 권총으로 무장한 강도가 인질극을 벌여 두 사람이 죽는 충격적인 장면이 생중계되기도 했다. 어설프게 강도를 제압하려한 한 노숙자는 총에 맞고 쓰러지고 그 사이 인질이 탈출하자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강도를 현장 사살했다. 관광객에게는 버거운 잔혹사로 가득한 곳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쎄 성당에서 사진 찍다가는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바로 갈취당하기 십상이란다.

상파울루 도심 시립미술관 앞

오전 7시 빵집에 도착해 플라스틱 입장권을 뽑고 구석에 자리 잡았다. 송하승 씨가 늦잠 자는 바람에 늦는다고 해서 세프 격인 친구에게 추천받은 마늘 빵과 커피 콘 레체(우유 넣은 커피)를 마셨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아시아인이 신기한지 오렌지 주스 짜는 직원은 곁눈질로 나를 보며 연신 실실거리며 웃었다. 약속 시간보다 30여분 늦어 하승 씨가 부리나케 가게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승과는 이날 처음 본다. 남미사랑 단톡방에서 연락을 주고받아 낯선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일면식 없는 한국 청년이었다.


하승은 상파울루에 9년가량 거주한 한국어 강사다. 한국에서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다 답답함을 느끼던 터에 브라질에 사는 지인 초대로 상파울루에 왔다가 눌러앉았다. 브라질 연인과 함께 살고 있고 줌으로 브라질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산다. 브라질인과 결혼해 영주권을 얻었고 포르투갈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본인 성격이 극단적인 외향인이라 소개한다. 함께 길을 걷다 보면 혼자 있는 브라질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쉽게 건넨다. 엄청난 사교성이다. 수백명의 브라질 여인들과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지금은 포르투갈인처럼 생긴 9살 연하 여인에 충실하다. 하승 씨 연인은 심리상담사를 하는 마음씨 순한 상파울루 사람이란다.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보여주는 사진으로 얼핏 봐도 기품 있는 미인이었다.


하승과 초인적인 행군을 시작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상파울루 숙소까지 들어와 뻗을 때까지 50시간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오는 기내에서는 한두 시간 졸다 깨다 했고 JFK공항에서는 마땅히 잠잘만한 곳이 없어 뜬 눈으로 견뎠다. 다행히 뉴욕에서 상파울루로 오는 기내에서 옆좌석들이 비어 있는 덕분에 옆으로 누워 2~3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다 하며 왔다. 하승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일본인 거주구역 리베르다지 거리에 있는 자기 숙소로 데리고 갔다. 한국에서 예약한 숙소는 오후 2시부터 체크인하고 하승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상파울루에서는 신용카드, 여권, 카메카 같은 귀중품을 갖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길거리에서는 휴대전화를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한다. 오토바이나 자전거 타고 채가거나 강도 같은 강력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 하루 사용할 현금만 들고 비치웨어와 슬리퍼 신고 나왔다. 강도 눈에 보기에 뺏어갈 만한 게 없을 아시안인으로 보이기를 바라며 초라한 행색을 갖췄다. 


리베르다지 숙소에서 걸어 파울리스타 거리(번화가)를 관통한 뒤 도심 공원을 지나 우스카 프레이레 가(가로수길)로 넘어갔다가 메르카드 두 뮤니시팔(중앙시장)에 들른 뒤 비즈니스 중심지(테헤란로)에 자리한 한국 식당 미림까지 주파했다. 총 2만5천 보를 걸었다. 50시간 이상 제대로 잠을 못 자고 강행군했으니 미림에서는 머리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신라면 한 그릇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뻗었다. 실신에 가까운 잠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푹잤다.


파울리스타 거리는 상파울루 중심을 가로질러 4km가량 곧게 뻗은 번화가다. 한국 영사관부터 일본 문화관, 방송사, 신문사, 대학교까지 밀집한 상업 문화 중심지다. 이곳을 거지 행색 차림인 한국인 2명이 슬리퍼 끌고 걸어 다녔다. 한국 문화원 건물은 단전 탓에 문을 닫아 문 앞에서 발을 돌려야 했다. 파울리스타 거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혼자 갔다가는 예약하지 못해 대기하다 포기해야 했겠으나 하승이 수완 좋게 두 사람이 올라갈 표를 구했다. 하승은 사막 가운데 혼자 떨어뜨려도 원주민 부족과 친해져 행복하게 살아갈 사람이다. 친화력, 수완, 소통 능력이 극치에 이른 걸물이다.


절대 외향성의 인물과 곳곳을 기웃거리다 파울리스타 거리와 우스카 프레리 거리를 잇는 도심 공원을 가로질렀다. 우스카 프레리 거리는 꾀죄죄한 리베르다지와 달리 집들이 깨끗하고 세련됐다. 길가에 늘어선 부띠끄 샵도 멋지고 길가에 자리한 카페들은 근사했다. 우리네 가로수길이 연상되는 곳이다. 산토 그랑(Santo Grão) 커피전문점에서 사약에 가까운 진한 커피를 더블로 마셨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주문한 커피지만 그 깊이와 풍부한 맛에 홀딱 빠져버렸다. 여기가 유명한 곳인 이유가 있었다. 커피 전문점 너머에는 4~5층 스튜디오처럼 생긴 작은 부띠끄 호텔이 보였다. 유명 연예인이 상파울루에 오면 묵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파울리스타 쪽으로 이동했다. 상파울루 현지 뷔페식당 마나이 가스트로노미아(Manai Gastronomia)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상파울루 음식의 향연을 즐겼다. 2만 원가량 비용으로 온갖 열대과일 음료를 곁들인 신라호텔 급 뷔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안심 등심 닭고기 스테이크에다 온갖 야채 과일 콩류 요리를 먹고 야자수 열매에 빨대 꽂아 갖다주고 수박 망고 파파야 같은 열대 과일 주스를 무제한 주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맛있어 배 터지게 먹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끝도 없는 장정은 이어졌다. 루스라는 부랑자 점거지역을 우버를 타고 부리나케 가로질러 메르카도 두 뮤니시펄에 갔다. 우리네 남대문시장 같은 곳이다. 오후 5시 넘어 도착해서인지 파장 분위기였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체력이 한계에 닿은 것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하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퇴근길 지하철로 안내했다. 퇴근 시간 상파울루 지하철은 혼자라면 가지 말 것을 권고한다. 밀집대형으로 몰려가는 이용객들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열차 객실 안에서는 사람 속에 갇혀 꼼짝달싹 못한다. 특히 1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시외곽으로 빠지는 무리에 휩쓸리면 자칫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 <월드워 Z>에서나 봄직한 폭주하는 좀비들 사이에 끼이는 꼴이 된다. 갈아타는 동선도 미로와 같다. 나침반 같은 방향감각을 가진 이도 길을 잃고 인파 속에 갇힐 거다.


지하철역을 나와 고층건물 밀집한 거리를 한참 걸어 한식당 미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폭탄주 마시고 집에 가서 뻗고 싶었다. 서둘러 소주를 시키려 하자 하승은 25세 한국인 여성 관광객과 선약이 있었다고 숙소까지 가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더라.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속으로 진짜 오지 말았으면 바라고 그 친구를 보냈다. 퇴근길 교통 체증이 살렸다. 막히는 길로 돌아오는 걸 포기하고 하승과 25세 여인은 한국인 거리 봉헤찌로로 방향을 틀었다고 톡이 왔다. 하승의 마음이 바뀔까 봐 우버를 서둘러 불러 식당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차 안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휴대폰 버튼을 잘못 눌러 우버를 취소했다. 포르투갈로 뭐라고 떠드는 드라이버 탓에 하승과 전화했다. 하승 통역 덕분에 10 헤알로 양해를 구하고 내려 어둠깜깜한 길에서 우버를 다시 불러야 했다. 상파울루에서 혼자 어두운 골목에서 오후 8시 넘어 길거리에 서 있는 아시안이라니. 죽으려고 환장한 거다. 다행히 슬리퍼에 촌스러운 빨간 비치웨어 반바지, 머리는 길러 치렁치렁 산발인 데다 연갈색으로 염색한 덕분인지 무사히 우버를 타고 숙소에 돌아왔다. 살아서. 

상파울루 도심 파울리스타 거리
상파울루 둘째날 이비라푸에 돈 뒤 센트로 워킹투어

3월17일 새벽 3시 30분 깼다. 어제 9시 30분쯤 누웠으니 대충 여섯 시간은 잤다. 노트북을 들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한참 여행기를 작성하고 있으니 호텔 이페의 주인장 나카지마 카즈하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나왔다. 상파울루에서 태어나 브라질 여인과 결혼해 살아온 터라 일본어보다 포르투갈어가 능숙했다. 극동 아시아에 뿌리를 둔 두 동양인이 상파울루에서 만나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를 섞어 대화하는게 우스꽝스러웠다. 


카즈하가 준비한 아침식사를 환상적이었다. 커피는 풍미 가득했고 열대 과일은 달고 신선하고 바케트 빵 위에 토마토를 올려 구운 빵은 일미였다.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고 게걸스럽게 먹는 내 모습을 보더니 카즈하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계란 먹을래?”라고 물었다. 눈을 크게 뜨고 “응"하고 답하자 카즈하는 스크램블을 만들어 수줍게 갖다 놓았다. 다른 투숙객 상 위에는 없는 계란 스크램블이 내 밥상 위에 올려졌다. 이렇게 소심하지만 배려심 많은 카즈하와 친구가 되었다. 


조식을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한 시간가량 자고 나자 체력이 회복되는 걸 느끼고 이비라뿌에라 공원으로 갔다. 상파울루 시내에 자리한 가장 큰 공원으로 한 바퀴 돌면 10km나 된다고 한다. 공원에 들어섰더니 남자 대다수는 웃통을 벗고 자외선 만땅의 햇살을 받으며 뛰거나 걸었다. 여자 다수는 브라탑 또는 비키니 입고 산책 코스를 뛰거나 잔디에서 축구를 즐겼다. 축구의 나라답게 예사 실력이 아니었다. 날아오는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해 발리슛을 갈기다니. 


웃통 벗기가 국룰인 듯해 나도 벗었다.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햇살을 받자 금발처럼 빛나고 그 머리를 묶어서 꽁지를 만들고 웃통을 벗고 있으니 브라질 현지인과 다를 바 없었다. 선글라스까지 꼈으니. 공원을 두 바퀴나 돌고 철봉에서 턱걸이도 하고 한참 땀 내고 있는데 하승이 김치찌개 사진을 보내며 자기 집으로 밥 먹으러 오라는 톡을 보내왔다. 어제 새벽 3시까지 25세 여인과 광란의 밤을 보낸 뒤라 김치찌개로 속을 풀려고 만들었는데 내 생각이 났나 보다. 우버를 타고 하승 집으로 갔다. 하승이 끓인 김치찌개를 환상적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 일본 소바 식당에서 일한 솜씨가 나왔다. 하승은 참 다채로운 삶을 살아온 친구다. 


김치찌개에 밥 말아 두 그릇을 해치운 뒤 하승을 따라 세상에서 두 번째로 비싼 커피를 마시러 구도심으로 향했다. 상파울루 금융 중심지 복판에 자리한 일 바리스타(Il Barista) 커피숍에서 자꾸 새 커피를 주문했다. 남미에 서식하는 자꾸 새가 커피 원두를 먹고 배설하면 다시 원두를 회수해 커피를 만드는 것으로 루왁 커피 다음으로 비싸다고 한다. 자꾸 커피는 부드러우면서도 쏘는 맛이 강하고 뒷맛이 개운하면서도 커피 입에 담았다가 목 넘김하고 나면 은은한 향이 입 안에 남았다. 비싼 이유가 있었다. 


커피 향이 가시기도 전에 하승은 다시 어제처럼 장정에 들어갔다. 구도심 곳곳을 돌면서 워킹 투어를 시작했다. 상파울루 구도심은 파울리스타 거리보다 훨씬 고풍스러우면서도 깊었다. 오랜 역사가 담긴 건물은 세월의 더깨를 입고 전통의 미를 뽐내고 있었다. 곳곳에 홈리스 족과 부랑자들이 자리하고 있어 해 넘어가면 절대로 오면 안 되는 곳이라고 한다. 낮에도 휴대전화를 내놓고 다니면 위험한 곳이다. 


하승의 가이드를 따라 식민지 시절 지어진 건물부터 100년 넘게 세워진 고층 빌딩까지 찾아다녔다. 그중 상벤투 성당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노숙자 집단거주 지다시피 한 쎄 성당은 멀리서 보고 지나쳐 아쉬웠는데 그 아쉬움을 상벤투 성당이 가시게 했다. 브라질 성당 예술은 스페인 성당보다 화려하다. 오랜 세월이 내뿜는 작품의 깊이야 스페인 성당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상파울루 성당 안에 새겨진 작품에는 간절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이비라푸에라 공원은 상파울루 시민들의 안석처다

이비라푸에라 공원부터 걸었으니 오늘도 어제 못지않게 걸었다. 우버 타고 한참 나온 구도심에서 리베르다지 거리를 관통해 숙소까지 걸었다.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미란다 커가 리베르다지 거리에서 마시면서 유명해진 아사히 주스를 마셨다. 묘한 맛이다. 망고와 파파야, 그리고 바나나를 섞어 놓은 듯한 맛을 내는 적갈색 주스인데 건강에 좋은 슈퍼푸드라고 한다. 하승은 몸에 좋은 슈퍼푸드를 즐겨 먹고 마신다. 그런데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는다. 슈퍼푸드니 먹으면 몸에 좋다며 밥에 좁쌀처럼 생긴 브라질 곡류도 넣고 아사히 주스를 즐겨 마시면서 입에는 늘 전자담배가 물려 있다. 담배 끊으면 웬만한 슈퍼푸드 먹는 것보다 몸에 훨씬 나을 텐데. 


마트에서 저녁 찬거리를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저녁식사로 이번에는 된장찌개를 만들겠단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낮에는 김치찌개,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먹는 한국인 관광객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싶다. 브라질 독주 까샤샤 한병도 샀다. 까샤샤 원액에 라임을 짓이겨 뽑은 라임액을 넣어 만든 까샤샤 칵테일을 음미하고 된장찌개를 안주삼아 먹었다. 밥 먹고 나니 다시 방전됐다. 하승은 오후 7시 온라인 수업을 해야 했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2시간가량 자고 일어나니 하승에게 톡이 와있었다. 불금에는 숙소에 있는 게 아니라며 상파울루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자고 멋진 바의 사진들을 보내왔다. 하승의 체력은 불가사의하다. 어제도 새벽 3시까지 달리고 오늘 낮에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저녁에 강의까지 하고서 다시 밤에 나가자고 한다. 나도 하루 3시간씩 수영, 웨이트, 스텝업을 빠지지 않고 해온 터라 체력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데 하승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상파울루 밤 문화를 경험하지 싶었지만 눈을 딱 감고 그냥 숙소에 남았다. 오늘 밤에 나갔다가는 내일 꼼짝도 못 하고 숙소에서 누워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날 상파울루에서 90km 떨어진 해변에 놀러 가기로 했다. 상파울루에서 사는 한국인 여성분이 하승에게 해변에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자기도 친구 한 명 데리고 나올 테니 나도 데리고 가자고 말했단다. 남미사랑 브라질 단톡방에서 어리바리한 질문을 올리는 내가 궁금했나 보다. 참, 그 여성분도 단톡방에 있다. 상파울루 해변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이라. 생애 첫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설렌다. 

상파울루 도신 금융중심지에서 자꾸 커피를 마셨다
가루다부터 코파카바나까지 브라질 해변 만끽


초저녁에 잔 탓인지 밤늦게부터 자다 깨다 하다 새벽녘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하승 집에 도착해 함께 지하철역으로 이동했다. 하승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금강불괴 수준이다. 지하철을 타고 차를 가진 여성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움직였다. 도요타 코롤라를 탄 여성이 우리를 픽업해 가루자 해변으로 향했다. 가루자는 상파울루에서 동쪽으로 90km가량 떨어진 해변 마을이다. 외국인 관광객보다 마을 주민들이 훨씬 많은 고즈넉한 해변이었다. 


자외선이 화살처럼 쏟아져도 하승은 해변을 뛰었고 나는 파도 너머로 잠수해 바다 멀리 나아갔다. 동행한 여성분은 본인 요청에 의해 자세하게 신변사항을 밝히지 않겠다. 물속에 들어가기보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해수욕 즐기는 이들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여성의 취향을 존중해 하승과 나는 짐을 맡기고 마음껏 대서양에 뛰어들었다. 자릿세 삼아 내놓은 튀김 요리를 먹으며 한참 놀다 해변에 누워 잠들었다. 햇볕은 따갑게 쏟아지고 파도는 연실 넘실거리고 불면 날아갈 듯한 고운 모래로 가득한 모래사장에서 낮잠이라니. 꿈꾸던 브라질 여행의 장면이다. 


주말 교통체증을 우려해 오후 2시 전에 해변에서 나왔다. 여기는 막히면 대책이 없는 곳이란다. 서툴기 그지없는 운전자의 운전 탓에 불안에 떨면서 상파울루에 도착했다. 리베르다지 일식집 스키야에서 규동을 폭풍 흡입한 뒤 하승씨 집에서 씻고 잠들었다. 하승은 오랜만에 여자친구 만나러 나갔다. 자정 너머 리우 데 자이네루행 야간버스를 타야 하므로 밤 11시까지 푹 잤다. 하승은 버스정류장까지 동행하겠다고 고집했다. 안 그래도 자정 가까이 혼자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버스를 타는 게 겁난 터라 하승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100달러 환전을 하승에게 요청하면서 그 절반액을 감사의 표시로 하승에게 건넸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인지 놀라는 하승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하승이 찾아준 리우 데자이네루 행 버스에 올라탔다. 


우등고속버스처럼 뒤로 제길 수 있는 좌석이라 다시 잠들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깼으나 비교적 잘 자 왔다. 2층 버스 맨 앞줄에 있는 좌석이라 아침 해가 뜨자 사위가 환해졌고 리우 데 자이네루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류장에서 내려 우버를 탔다. 우버 드라이버가 게스트하우스를 찾지 못해 헤맸다. 브라질 빈민가 파벨라 같은 곳으로 차를 몰아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다 차를 세우고 포르투갈 말로 뭐라고 떠들었다. 한 개도 못 알아들었다. 그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본부와 소통하더니 구글 맵을 꺼내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난 뒤 자기가 고생했다고 정상 가격의 1.5배를 청구했다. 청구 금액이 늘었다는 걸 나중에 결제금액을 확인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이가 없었다. 


숙소로 들어갔다. 코파카바나 해안에서 언덕 쪽으로 올라간 아쿠아레메 호스텔은 안으로 들어서자 언덕 아래로 난 넓은 발코니 너머로 해안이 가득히 들어왔다. 바다 쪽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했고 햇살은 널 따른 거실을 가득 채웠다.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 닷새를 지낸다. 5일 숙박료는 13만 원가량. 하루 2만 원 조금 넘는다. 아침식사는 캐주얼하지만 푸짐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미녀 이파가 만들어준 스크램블과 유기농 커피에 빵, 시리얼, 머핀을 곁들였고 열대 과일을 디저트로 먹었다. 전 세계에서 온 배낭족들이 활기차게 어울렸다. 


아일랜드 배낭족 이파에게 한눈에 반했다. 친절하고 사려 깊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온 내게 관심을 보였다. 숙소에 머무는 유일한 동양인이라 그런 듯하다. 이파는 리우 데 자이네루를 파라다이스라고 소개했다. 이파는 이곳에서 일하며 머문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한다. 주인장 안나의 안내로 게스트하우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바다가 보이는 루프탑부터 피트니스센터를 갖추고 있다. 투숙객들은 왓츠앱을 통해 어울리며 루프탑에서 파티를 열고 해변에서 함께 놀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이들과 벌이는 하룻밤 연애는 당연히 빠지지 않을게다. 벌써 여기저기서 섬싱이 분주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반했다. 지금 루프탑에서 쏠(SOL 태양이란 뜻)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여행기를 쓰고 있다. 옆에는 흑진주처럼 고운 피부가 빛나는 여인이 노트북을 열고 작업하고 있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자신을 싸이라고 밝히며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싸이는 영국 북부해안 출신으로 연세대에서 3개월간 공부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온 싸이와 한국에서 온 나는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인연을 기뻐했다. 우리와 오른쪽 조금 떨어진 너른 소파에는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읽거나 통화하는 배낭족들이 햇살 가득한 코파카바나의 한가한 오전을 즐기고 있다. 브라질 여행은 여러 가지로 내게 행운을 허락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리우는 비가 오고 구름이 가득했는데 오늘은 눈부실정도 맑은 날씨로 돌변했다 한다. 상파울루도 사흘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이어졌다. 브라질이 나를 반기는 것이다.


저녁에는 한국에서 온 강건이라는 친구와 만나 브라질 전통 소고기 요리 슈하스코를 먹기로 했다. 이파네마 해변 가로타라는 식당은 슈하스코로 유명한 곳이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있는 피트니스 코너에서 턱걸이 5세트, 복근 3세트, 팔 굽혀 펴기 500회로 몸을 푼 뒤 갖춰진 기구들로 웨이트를 열심히 했다.  나흘 만에 하는 쇠질이다. 땀에 흥건히 배어 나왔다. 상쾌하다. 이곳은 시간이 더디 흐른다. 코파카바나 해변을 지나 이파네마 해안에 연한 가로타까지 걸어서 1시간 안팎 걸린다. 구글맵 보면서 천천히 걷기로 했다. 모래사장을 밟고 갈 거다. 혹시나 만날 수 있는 강도를 대비해 주머니에는 오늘 하루 쓸 헤알화만 넣었다. 

가루다 해안에서 미지의 여성과 해수욕을 즐기다
낮엔 이파네마의 햇살을 받고, 밤엔 보사노바 음악에 취하다


숙소 앞 해변은 코파카바나에 붙어있는 헤메라 불린다. 코파카바나에 바로 이어져 모레사장을 걷다 보면 어디까지 헤메고 어디부터 코파카바나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헤메부터 코파카바나, 이파네마, 르브론 해변까지 5km 모래사장이 해안을 따라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일요일 맞아 해변은 브라질 사람과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한여름 해운대에 북적이는 인파가 5km에 걸쳐 빼곡히 해변을 채운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다 쪽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실랑이하는 인파로 가득하고 보도에 연한 모래사장에는 갖가지 스포츠를 즐긴다.  


모래사장 곳곳에 마련된 배구 코트에서 2인 1조를 발과 머리, 가슴으로 축구공을 트래핑해 상대 코트로 넘기는 발배구가 가장 인기가 있다. 검게 그을린 남자 넷이 하체와 머리로 능숙하게 공을 다루며 넘기는 모습에 감탄하며 보고 있다. 헉! 그런데 내가 뭘 본거지? 코트 위로 넘어온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해 자기 팀원에게 건넸고 다시 헤더로 네트에 붙이자 선수 하나가 날아서 발로 스파이크를 날렸다. 손이 아니라 발로 스파이크한 거다. 코트 사이를 나누는 네트는 우리네 족구가 아니라 정규 배구 경기에 적용하는 높이, 그니까 우리가 발돋움해서 팔을 뻗어야 닿는 높이의 네트 상단을 날아서 발로 스파이크한다는 거다. 프로 선수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이 이 정도 실력이라니 브라질 축구 대표팀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건가.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브라질 축구 대표팀과 벌이는 A매치 경기를 번번이 지더라도 뭐라 하지 않기로 했다.  


평생 볼 티팬츠와 여자 엉덩이를 한 시간 안에 다 보면서 뙤약볕 모래사장을 1시간가량 걸었다. 갈증과 허기가 찾아왔다. 해변에 인한 골목으로 들어가 현지인이 먹는 빵과 주스를 시켰다. 얼핏 빵으로 보이길래 주문했는데 속이 고기로 가득했다. 하나 먹었더니 든든하다.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그늘 밑에 누웠다. 바다 바람맞으면서 잠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등만 대면 잠이 든다. 시끌벅적 소리에 눈을 뜨니 햇살이 사그라들면서 해수욕 인파가 슬슬 모래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해변에서 한참 쉬다가 저녁식사 장소인 가로타 데 이파네마(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로 갔다. 이곳은 브라질 쇠고기 요리 슈하스코로 유명한 식당이다. 보사노바 음악 창시자 카를로스 안토니오 조빈이 이곳에서 보사노바 명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를 작곡해 유명 곳이도 하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강건 씨는 오로지 보사노바 음악의 성지에서 보사노바를 듣고 싶어 5박 6일 일정으로 리우 데 자이이네루에 왔다고 한다. 김도엽 씨는 50일간 중남미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일정으로 브라질에 들어왔다. 나와 도엽이 슈하스코 요리를 먹는 사이 강건은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의 악보가 담긴 티셔츠를 사고 곳곳에 붙어있는 조빈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강건의 안내로 보사노바 전문 공연장, 리틀클럽에 갔다. 그곳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만남이 생겼다.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보사노바 뮤지션을 만난 것이다. 12세 브라질로 이민 와서 보사노바 뮤지션으로 성공한 박유미 씨다. 그녀는 리오 데 자이네루에서만 11년간 공연하고 있다. 익숙지 않은 한국어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공연을 보았다. 재즈와 삼바 음악을 접목해 만든 보사노바 음악인지라 내게는 익숙지 않은 선율이었으나 진지한 표정으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공연을 보며 나름 보사노바를 즐겼다. 


1부 공연을 마치고 나왔다. 우버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인 데다 짧은 거리라서 그런지 우버 연결이 자꾸 끊어졌다. 기다리다 못해 뛰어서 숙소까지 달렸다. 강도가 쫓아오기 힘든 속도로 뛰었다. 걷다 뛰다 하며 30분가량 달리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서 숙소에 도착했다. 너른 거실과 루프탑에는 배낭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시끌벅적했다. 일요일 밤 브라질 코파카바나에 딱 맞는 광경이다. 전 세계에서 온 젊은 배낭족들이 흥겹게 어울리는 모습을 뒤로한 채 씻으러 들어갔다. 함께 어울리지 못해 아쉬웠다.

리우의 해변은 해변은 날마다 해수욕 인파로 넘친다
리우가 세계 3대 미항이라고? 왜? 갸우뚱


동행자들이 리우 예수상 Cristo Redentor를 보러 가기 위해 새벽 5시 일어난다고 하길래 나는 따로 가겠다고 했다.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거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예수상에 다녀오기가 어렵지 않을 듯했다. 먼저 다녀온 여행자가 오전 9시 30분 넘어 올라가는데 기다리지 않고 올라갔다고 한다.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다. 환전하지 않고 입장권 매표소에 도착했다가 헤알화가 없어 고생했다. 다행히 미국 교포 청년의 도움을 많아 달러화를 지급하고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교포 청년 2명 중 하나는 혹시나 내가 사기꾼이 아닐까 싶어 경계하는 눈빛이 뚜렷해 말을 섞기 싫었다. 짧게 감사 표시하고 그들과 떨어져 움직였다. 여행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데 저리 경계하고 귀찮아하는 사람이 가장 싫다. 그런 사람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중남미 관광객 사이에 끼어 한참 기다렸다가 트램을 타고 예수상에 올랐다. 햇살이 눈부시게 맑아 예수상이 깔끔하게 보였다. 제법 웅장했지만 그뿐이었다. 별 느낌이 없었다. 예상한 그대로라서 그런가. 그보다 예수상 아래 동선 너머로 보이는 리우 데 자이네루의 전경이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낮게 깔린 건물이 특색 없이 성냥갑처럼 늘어선 것 외에 별로 볼 게 없었다. 바다에 늘어선 섬들이 밥공기 거꾸로 박아놓은 모습이 그나마 인상적이었다. 


3대 미항은 다 다녀왔다. 아들과 함께 간 이탈리아 나폴리항은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에 털릴 뻔해 첫인상부터 좋지않았다. 항구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옛날에는 그리 멋진 항구가 없었나 보다. 호주 시드니 항구는 그나마 나았다. 조가비 껍질 포개놓은 듯한 오페라하우스 중심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해안선이 멋졌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배 타고 오르면 멋진 대학 캠퍼스도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리우 데 자이네루 항구는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돌산 말고는 인상적인 곳이 없었다. 그나마 나폴리 보다는 낫다. 인증샷만 여러 컷 촬영하고 트램 타고 내려왔다. 트램 입구 근처에 서 있는 햄버거 카트에서 길거리 햄버거를 사서 먹었다. 엄청난 열량의 4천 원짜리 햄버거를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솔 맥주를 하나 마시고 골아 떨어졌다. 오후 2시 잠들었는데 오후 10시 일어났다. 지난 며칠간 강행군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니 살 것 같다. 다만 저녁을 먹지 못해 배고팠다. 숙소를 어슬렁 거리면 돌아다녔는데 먹을게 하나도 없다. 이런 날 라면 하나 먹으면 딱 좋은데.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주식시장 보고 경비 정산하고 여행기를 쓰면서 보낸다. 내일 오전 10시 30분 워킹 투어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므로 새벽 4시 이전에는 자야겠다.

리우는 바다에 점점이 뿌려진 섬들이 예쁜 항구다
브라질인 가이드와 도보로 리우 센트로의 유적지 탐방


구루워크(Guru Walk) 통해 리우 데 자이네루 구도심(센트로) 도보 여행에 나섰다. 브라질 현지 가이드가 사이트 통해 모은 관광객을 데리고 리우 데 자이네루 센트로 지역을 2시간가량 걸으며 브라질 역사, 건축물, 유적지 위주로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다. 투어가 끝나면 참석자는 가이드에게 10달러 가량을 지급한다. 센트로 지역 주요 건축물과 유적지를 돌며 브라질과 리우 데 자이네루 역사를 압축적으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호주 소녀 아렌을 비롯해 뉴욕커, 독일 부부 등 8명이 함께 움직였다.


오전 10시30분 집합장소인 치아트로 뮤니시파우(Theatro Municipal 시립극장) 앞에서 모였다. 리우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인 치아트로 뮤니시파우에서는 오페라 발레 같은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1908년 설립된 건축물이다. 건축물 정면 상단부에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부터 독일 괴테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건물 외양 곳곳에 번쩍이는 건 인조 금박이 아니라 진짜 금으로 치장했다.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다. 센트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힐만하다. 중앙 현관 앞 계단에는 노숙자가 드러 누워있다. 리우 샌트로 곳곳에는 노숙자들이 흉물스럽게 누워있다.


브라질 첫 수도는 살바도르였다. 리우 데 자이네루 부근서 금광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수도를 이전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첫 리우 데 자이네루 시장은 도심 속 식민지 시대 건물 600여채를 부수고 프랑스 파리를 본따 유럽 양식의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다. 도심 속 습지도 메워가면서 파리 양식의 건축물을 짓다가 군부 쿠데타에 이은 왕정 철폐와 공화정 수립 이후 근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현대식 고층건물이 난립하게 된다. 이탓에 기괴한 도시가 만들어졌다. 치아트로 뮤니시파우 중심으로 반경 1km 안에는 유럽 고전 양식의 건축물이 고풍스레 자리잡고 있지만 그 둘레를 현대식 고층건물이 솟아 에워싸고 있다.


브라질 최대 기업 페트로브라스 본사와 그 너머 리우 데 자이네루 대성당은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추한 건축물 톱10 안에 들어가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한바퀴 도는데 5km에 불과한 센트로 중심가가 파리와 같다면 센트로를 압박하며 솟은 건축물은 홍콩 같다고 할까. 외국인 눈에 서울도 비슷할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왕궁과 북촌 같은 전통 가옥을 현대식 고층 건물이 에워싸고 있으니.


19세기초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입하자 포르투갈 왕실이 식민지 브라질로 피난했고 왕족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브라질은 아무 통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포르투갈 왕족과 신하를 맞이해야 했다. 왕족과 신하가 들어온 항구가 센트로에 연해있다. 왕족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해 센트로 내 살던 식민지 유력자들이 반강제적으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쫓겨난 귀족들은 나중에 쿠데타에 협조해 왕정을 몰아내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살던 집을 뺏겼으니 그럴만도 하다.


호주에서 온 소녀 아렌과 여행 정보를 주고 받으며 걷다보니 투어가 끝났다. 포르투갈 왕족이 첫발을 디딘 항구 쪽으로 이동해 한참 항구를 바라보다 배가 고파 버거킹에 들어갔다. 장기 여행 중인 아렌은 비용을 아끼려고 싸가지고 온 스낵으로 점심을 대신하겠다고 해서 항구 앞에서 헤어졌다. 버거킹을 허겁지겁 흡입한 뒤 구글 맵에 의존해 센트로 곳곳을 돌아다닌 뒤 우버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코파카바나 해안에서 내려 헤메 해안을 지나 숙소까지 돌아왔다. 파벨라 지역 안쪽으로 올라가는 게 흠이지만 숙소는 너무 좋다. 이제는 집에 가는 기분마저 든다. 아침에는 해무가 낀 바다를 감상하고 하루 종일 시원한 바람이 끊이지 않고 햇살은 넘치게 들어오는 곳이다. 리우에서 한달살기 한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선택할 것이다.

치아트로 무니피사우는 상파울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혼자 여행에 빠진 여행자, 리우라는 천국을 엿보다


새벽 5시 30분 바다는 해무에 가려 있고 빛의 색깔은 막 기지개를 켠 듯 옅다. 숙소 루프톱에는 배낭족들이 밤새 피운 마리화나 향이 배어있다. 하도 피어대는 통에 간접흡연으로 한대는 피운 느낌이다. 아침 명상 마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자 바다가 해무를 걷어내고 맑아졌다. 바람이 만든 물비늘을 따라 빛이 요란하게 산란하다. 멧새인지 바다새인지 가까이서 울고 멀리 개들이 짖는다. 숙소 뒤편에 있는 파벨라에도 불이 하나씩 들어왔다. 


보사노바 청년 강건에게 톡이 왔다. 센트로에 있는 셀라론 계단을 가고 싶단다. 건은 한국에서부터 가고 싶은 곳을 정했다. 다른 곳은 쳐다보지 않는다. 점으로 이동하며 명소만 찍고 이동한다. 참 나와 많이 다르다. 나는 선 또는 면으로 움직인다. 명소만 보고 이내 철수하지 않고 명소 사이를 걷거나 그 일대를 정처 없이 헤매며 동네를 통째로 체험한다. 리우 데 자이네루에서는 위험한 행위지만 버릇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겁이 나 치아트로 뮤니시파우만 보고 팡 드 아수카(속칭 빵산)를 보러 간다는 강건 탓에 어쩔 수 없이 셀라론 계단에서 기념 촬영하고 리우 데 자이네루 대성당 내부를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겉에서는 보기에 리우 데 자이네루 성당은 흉측하게 생겼다. 시멘트를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 성당이라기보다 미사일 발사기지 같다. 내부는 다르다. 4면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가톨릭 성당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2만 명을 수용하기에 좁아 보이지만 제단을 중심으로 충분한 인원이 미사를 드릴 수 있을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채광창을 내서 자연광이 십자가 모양으로 빛을 내린다. 

빈민촌 파벨라가 보이는 이파네마 해변

혼자 여행이 편해지고 있다. 동행과 함께 움직이는 건 비용 절감 면에서는 좋지만 제약이 많다. 상대 여행 스타일을 존중해야 하고 취향이나 걱정을 고려해야 동선을 짜야한다. 어느새 혼자 다니는 막 여행에 익숙해지고 있다. 상당히 외롭지만 자유로워 좋다. 빵산에 가는 강건에게 인사를 건네고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그 비싼 케이블카 요금을 내고 빵산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남산 케이블카도 타지 않은 사람이 굳이 다른 나라 뒷산 케이블을 거액을 주고 타고 싶지 않았다. 예수상이 더 높은 곳에 있으므로 그곳에 올라 본 것으로 리우의 전망은 만족한다. 


숙소에 돌아와 책도 읽고 밀린 보고서도 보면서 뒹굴었다. 아일랜드 미녀 이파는 늘 보던 소설책을 들고 우아하게 오가고 페인 소녀 아나는 샤워 마치고 티팬티 차림으로 오락가락하며 미소를 건넨다. 리우가 천국인 것 틀림없다.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하고 전 세계 미녀들은 헐벗고 다니고 운동으로 단련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며 다니는 남성들 입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물려 있다. 나는 이상한 천국에 초대된 이방인 같다. 나이 차 탓인지 문화 탓인지 그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개별적으로는 모두 친하게 지내는데 그들이 한데 모인 곳에는 미소만 보내고 지나친다. 이런 것도 용기가 필요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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