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남쪽에 파타고니아가 있다면 북쪽에 페루가 있다
성스러운 계곡 돌며 잉카의 영광과 비극 체험
페루 쿠스코에 들어왔다. 잉카인은 퓨마 모양으로 쿠스코를 조성하고 수도로 삼았다. 쿠스코는 케추어로 배꼽이란 뜻이다. 잉카인은 쿠스코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 스페인 약탈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쿠스코를 약탈하고 뒤 따라 들어온 가톨릭 세력이 잉카의 제단과 궁전을 파괴하고 그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잉카인이 쌓은 주춧돌과 석벽 위에 스페인이 세운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합쳐지면서 도시 모양이 스페인 시골 도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남미 어느 도시보다 쿠스코는 기품이 있고 아취가 있다. 아르마스 광장부터 산페드로 시장까지 골목 곳곳을 걸어 다니다 보면 도시가 자아내는 분위기에 흠뻑 젖는다. 우디 앨런 감독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마냥 걷다 보면 스페인 약탈자에 맞서 생존을 모색하는 잉카인들을 만날 수 있겠다 싶다.
아르마스 광장 정면에 잉카의 유적을 허물고 그 위에 흉물스럽게 자리한 바실리카 옆으로 이어진 골목을 걷다 보면 잉카인이 쌓은 돌벽들이 이어진다. 12각 돌이라 불리는 돌을 비롯해 갖가지 모양의 돌들이 종이 한 장 파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이 쌓여있다. 그 돌이 연결된 형상을 보면 잉카인이 땅을 지배한다고 생각한 동물 퓨마 모양이 있고 땅 속을 지배한다고 생각한 거대 뱀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이야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 찍는 배경으로 전락했지만 잉카 전성기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거대 건축물이었다.
다음날 아침 6시 45분 성스러운 계곡(성계) 투어를 가야 하는 터라 얼른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전날 피곤해 채 정리하지 못한 짐을 정리한 뒤 약속 장소로 나갔다. 남미사랑 단톡방에서 마추픽추 동행을 찾다가 알게 된 지영도 성계투어를 함께 한다. 지영은 세상 무해한 사람이다. 아줌마 같은 모습이 없지 않지만 늘 크게 웃는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고 추위에 떨고 있는 생면부지 외국인에게 자기 스카프를 건넨다. 느닷없이 함께 사진 찍자는 외국인이 있으면 나야 정중하게 거절하지만 지영은 한국어로 크게 “내가 찍어줄게"라며 그 외국인 옆자리에 선다. 잔디밭을 만나면 누워 뒹굴고 그러다 핸드폰을 분실했다 찾고 외국인과 눈만 마주쳤는데 큰 소리로 웃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한다. 괴짜가 틀림없다. 그런데 이 아줌마 같은 친구가 마음에 든다. 기본 심성에 악의가 없고 선하다.
지영 뒷자리에 앉아 성계투어에 나섰다. 지영 소개로 수줍어하는 한국인 부부를 소개받았다. 페루인 가이드 이르빈은 한국인 4명의 팀명을 리(LEE)로 정했다. 이날 일정은 쿠스코를 떠나 잉카 유적지 친체로, 모라이, 오얀타이땀보, 피사크를 숙소로 돌아온다. 스페인 약탈자들에게 덜 파괴되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유적지다 보니 잉카의 흔적을 보고 싶은 관광객들로 들끓는 곳들이다. 가이드 이르빈이 이끄는 우리 팀은 15명이나 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도 한분 있으셔서 이르빈이 시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게다가 내가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일정은 더 늘어졌다. 나중에 이르빈에 내게 제발 시간 맞추고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게 어글리 코리안으로 변신하게 된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친체로에서는 스페인 약탈자들이 잉카 유적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볼 수 있다.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분지는 갖가지 곡물을 키우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 잉카인은 평야를 내려다보며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했다. 돌로 벽을 세우고 작물의 부산물로 지붕을 얹은 옛 잉카의 마을은 상상으로만 가능했다. 돌벽은 허물어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축 위에는 멋대가리는 아예 없는 스페인 중세 건축물이 잉카의 신전과 건축물을 허물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애써 스페인 건축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잉카의 돌무기와 그 아래 분지에 형성된 작은 마을과 밭을 감상하며 늘어졌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V 자로 겹쳐지고 그 능선 사이로 구름에 가려 잠깐씩 얼굴을 드러내는 설산이 멀리 보였다. 그 산들 앞으로는 퀼트처럼 구획단 초록과 연두색 밭들이 잇대어 펼쳐지고 빨간 지붕을 이고 선 집들이 아자기자기 늘어섰다.
두 번째 행선지 모라이에서는 본의 아니게 어글리 코리안으로 전락했다. 이곳은 잉카인들이 가운데 중앙 원을 중심으로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며 해당 고도와 그 고도의 토양에서 사는 미생물에 의해 어느 곡물이 잘 자라는지 시험한 잉카 종묘 시험 재배지였던 곳이다. 정중앙 원 안에서는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으로 쓰이기도 했다. 수년 전 그 중앙에 누워 모습을 촬영한 한국인 여행자를 본 기억이 나서 나도 내려가기로 했다.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달렸다. 사람 키 크기 높이는 뛰어내렸다. 정신없이 뛰고 구르며 중앙으로 달려 내려갔다. 해발고도 4천 m에서 이 속도로 달리는 걸 보니 고산병은 정말 정복한 듯했다.
한참 달리는데 어디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가이드 이르빈이 다급하게 “리!”라고 불렀다. 왜 그러지? 갸우뚱거리다 옆에 있는 표지판을 보니 들어가면 안 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래 출입이 금지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얼른 빠져나와야 했다. 내려올 때는 어른 키 높이를 뛰어 내려오면 됐지만 올라가는 건 다른 얘기다. 사다리나 계단이 있어야 한다. 여행 준비하면서 읽었던 문구가 생각났다. 튀어나온 돌을 찾아야 한다. 잉카인은 각 원형 재배지마다 튀어나온 돌을 설치해 계단 삼아 올라왔다. 저쪽 20m 떨어진 곳에 엇박자로 설치한 계단이 보였다. 얼핏 돌을 잘못 배치해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으나 엄연히 계단이었다. 그 계단을 딛고 올랐다. 한참 올랐다. 고도 4천 m 산지에서 계단을 서둘러 오르다 보니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얼른 올라가야 한다는 일념아래 무작정 올랐다.
전망대로 돌아왔더니 이르빈이 다시 금지 푯말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사정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직원은 스페인어로 한참 내게 뭐라 했다. 그래서 출입금지인지 몰랐다,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 등 한참 해명한 뒤에야 밴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음은 성계투어의 하이라이트 오얀따이땀보다. 잉카가 스페인 약탈자에 맞서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요쇄다. 층층이 계단식 경작지가 가파르게 이어지고 정상에는 태양의 신전, 거주지, 전투 요새까지 갖췄다. 한국인 부부가 워낙 늦게 올라오다 보니 먼저 태양의 신전에 오른 뒤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콜카계곡이라는 곳이 저쪽으로 이어졌는데 사람의 왕래가 뜸했다. 그곳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한국인 4명은 여행객들과 떨어져 콜카계곡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곡물저장창고이자 전쟁 시 지휘본부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오옌타이땀보 전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밑에서 이르빈이 다시 소리쳤다. “리! 빨리 내려오라.” 콜카계곡은 여행객 동선에 빠져 있는 곳이었다. 하루 네 곳을 돌아야 하다 보니 콜카계곡까지 갈 여력이 없어 이르빈은 그곳을 동선에서 제외했는데 유일하게 한국인 4명이 콜카계곡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또 한 번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셈이다. 서둘러 4명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한국인 부부가 먼저 내려가라 해서 나라도 뛰다시피 내려가 이르빈에게 사정을 몰랐다고 해명하자 이르빈은 이제 간청의 눈빛을 보냈다. 그다음 행선지 피사크에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르빈 옆에 붙어 다녔다. 피사크를 대충 보고 다른 일행보다 먼저 밴에 도착해 앉아있다. 급속도로 친해진 미국 여성 산드라가 장난치듯 물어왔다. “리! 왜 여기 있어? 저 건너편 산에 다녀와야지?” 산드라에게 “함께 갈래?”했더니 정색하면 자기 자리에 앉았다.
말썽쟁이 한국인 하나 때문에 마음고생한 이르빈에게 급 친한 척했다. 나중에 이르빈과 친구 먹었다. 이 사람도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격정의 하루는 보내야 했으나 헤어질 때 따뜻하게 안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내일 하루 쉬고 드디어 마추픽추 등반에 나선다. 기대가 크다. 페루에 오는 이유가 십중팔구 마추픽추라고 한다. 산 정상까지 쫓겨올라가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숨어 살다시피 해야 했던 잉카인들의 비극이 안쓰럽다.
고난과 갈등의 연속이었던 마추픽추 가는 길
마추픽추 가는 길은 험난했다. 쿠스코에서 아침 6시 30분 밴에 탑승해 6시간 달린 뒤 이드로일렉트리카라는 작은 마을에 내려서 기찻길을 따라 11km를 걸어 아쿠아칼레엔테스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아구아칼리엔테스는 마추픽추에 오르려면 묵어야 하는 관문 도시 같은 곳이다. 스페인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으로 온천이 유명하다. 아구아칼리엔테스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잉카인이 걸었던 계단길을 1시간 20분 동안 오르거나 버스를 20~30분 타고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해야 했다. 나는 걸어 오르는 길을 택했으나 일행 3명은 버스를 타고 오르기로 했다.
일정은 처음부터 꼬였다. 마추픽추에 승객 20명을 태운 만원 밴에 처박혀 8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다. 당초 6시간 안팎이면 이드로일렉트리카에 도착해야 했으나 산사태로 도로가 막혔다. 굴삭기 2대가 서둘러 돌과 흙을 치워 차 한 대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우리 밴은 아슬아슬하게 임시도로를 건너야 했다. 밴에 탄지 8시간 넘어 트레킹 출발지점에 도착했지만 바로 출발할 수 없었다. 동행 중 한 명이 탈수 증세를 보였다. 손발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며 축 늘어졌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길 기다린 뒤 오후 4시에 출발할 수 있었다. 50세 여성 동행자 B는 좀처럼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처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그 사람 가방을 대신 맸다. 그럼에도 계속 늦어졌다. 급기야 산속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4명은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린 시간에 이드로일렉트리카에서 아구아테칼리엔테스로 가는 기찻길을 걷는 여행객은 우리밖에 없을게다. 목적지 아구아칼리엔테스에 다가오자 기차가 지나는 터널 2개나 나왔다. 동굴 속처럼 뚫어놓은 터널들을 지나려니 여성 동행 2명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터널을 지나자 갑자기 불빛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민가 불빛이라 하기에는 희미했고 조명이라고 하기에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날아다녔다. 남자 동행 N이 “반딧불이다"라고 외쳤다. 태어나서 반딧불을 처음 본 나는 신기했다. 그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불빛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그냥 밝은 불빛이었으나 N의 눈에는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잉카의 신 파차야마가 늦은 저녁 마추픽추로 다가오는 우리 일행을 반딧불이를 보내 환영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좋은 징조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들이 쏟아졌다. 다음날 맑을 것이라는 신호였다. 기상 조건이 좋아야 마추픽추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마추픽추에 오르지만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려 마추픽추 전경을 다 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일이 잦다. 맑게 갠 날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며칠씩 아구아칼레인테스에 묵으며 여러 차례 마추픽추에 오르는 이들도 있다. 날씨요정의 효능은 내일도 유효했다. 다음날은 더 없이 맑고 화창했다.
여행 중 처음으로 일행과 갈등이 빚어졌다. 사람 하나하나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궁합이 맞지 않았다. 남성 N은 여성 동행자 K를 좋아했다. 그것도 너무 티 나게. 아구아칼리엔테스 레스토랑에서 K가 신용카드로 계산하자 나는 나와 N의 음식 값을 현금으로 건넸다. N은 내게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다음날 K가 내게 현금을 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헷갈려했다. 나는 주었다고 하니깐 옆에 있던 N이 K 편을 들고 나섰다. 화가 났다. 이건 K와 내가 소통하며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인데 N이 끼어들면서 누가 맞는지 안 맞는지 진실싸움으로 변모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내가 그냥 한번 더 주면 되는 건데 N이 K를 대변하는 정의의 사도로 나서자 나도 발끈해 내가 돈을 건넨 증거를 보이고 난 뒤 대화를 끊었다.
나중에 N는 주제넘게 개입한 것을 사과했다. K도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다음날 비니쿤카 투어를 K와 함께 가면서 내가 화난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부디 좋은 기억만 남길 것을 당부했다. 여행 동행자도 궁합이 중요하다.
홀로 오른 마추픽추서 환한 얼굴의 잉카를 마주하다
새벽 5시 일어났다. 일행 3명은 버스 타고 마추픽추에 오르나 나는 걸어올라야 하므로 5시 20분 숙소에서 나왔다. 새벽어둠을 뚫고 걷다 보니 마추픽추 지상 검문소에 20분 만에 도착했다. 이곳부터 시간을 쟀다. 얼마 만에 오르는지 체크하고 싶었다. 잉카인이 마추픽추에 오르기 위해 걸었던 계단을 오르다 보니 맞은편 산 위에서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선으로 내렸다. 신비로웠다. 해발 고도 2400m지만 백두산보다 높은 곳이라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니 숨이 찼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아는 척하며 지나갔다. 나는 길을 잘못 든 포르투갈 여성을 불러서 바른 길로 안내했다.
한 시간 남짓 오르자 마추픽추 입구에 닿았다. 내 티켓은 오전 7시부터 입장할 수 있었다. 입구 직원 눈치를 보다 6시 30분 표를 제시하자 들어가라고 해서 얼른 들어갔다. 일행에게는 카톡으로 먼저 들어간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아한 날씨였다. 와이나픽추 산 아래로 돌로 구획된 마추픽추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햇살은 축복처럼 내렸다. 마추픽추를 마주한 어떤 이는 경건함을 느꼈고 어떤 이는 산정상까지 쫓겨 올라와 살아야 했던 잉카인의 비극에 안타까워했다. 사진으로나 보던 마추픽추의 모습이 두 눈으로 들어왔을 때 희열은 대단했다. 머릿속에 각인하고 싶었다.
계단을 내려가 잉카인이 세운 석벽을 손으로 만지며 걸었다. 석벽을 이루는 돌들은 종이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빈틈 하나 없이 쌓여 신전을 이루고 주거지를 만들었다. 하늘로 날아갈 듯 사선으로 뻗은 돌무더기는 잉카의 하늘을 지배하던 콘돌을 본땄다. 그 앞에 콘돌의 신전이 있다. 인신공양이 행해졌을 것으로 예상하는 태양의 신전도 멋진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절벽 따라서 계단식 밭이 일구어져 있고 그 위에 주거지가 반듯하게 나누어져 조성되었다.
정신없이 돌다 보니 40분 만에 출구가 나왔다. 다시 돌아가려니깐 경비원이 계속 직진할 것을 종용했다. 마추픽추는 일방통행이다. 일단 지나간 곳은 돌아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잉카 다리를 보지 못했다. 내 티켓으로는 잉카 다리를 볼 수 있었다. 출구 안내원에서 사정했더니 다시 입구로 가서 말해보라고 했다. 입구 직원에게 잉카 다리만 보고 나오겠다고 사정하자 여권을 달라고 하며 40분 주겠다고 했다. 서둘러 다시 입구를 지나 잉카 다리로 직진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느긋하게 올라온 우리 일행을 만났다. 트레킹 초반 잉카 다리에 들어가려다 만난 것이다. 일행 중 3명만 잉카다리까지 갔다. 나머지 한 명은 잉카다리 트레킹을 신청하지 않아 마추픽추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잉카다리까지는 10분 만에 올랐다. 절벽 중간에 툭 튀어나온 아슬아슬한 절벽 길 위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절벽과 절벽 사이를 건너던 곳이다. 그 나무로 된 다리를 잉카의 다리라 하나보다. 거창한 다리를 상상했던 터라 다소 실망하고 마추픽추 전망대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한참 촬영한 뒤 나는 내 여권을 맡고 있는 정문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일행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코스 탐사를 시작했다. 출구 밖에서 나머지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일행 N과 K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려던 생각을 접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오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계단을 내려와 아구아칼리엔테스 광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계단은 30분 만에 내려왔다. 광장에 도착하니까 일행이 없었다. 일행 B는 늦을까 봐 한 시간 일찍 출발했고 버스를 탄 나머지 일행은 나보다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한국 음식점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이드로일렉트리카로 가는 기찻길을 걸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쿠스코까지 안내할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추픽추를 걸어서 오르내린 뒤 11km를 걷고 다시 밴에 처박혀 6시간을 가다 보니 녹초가 되었다. 일행과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밴이 쿠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일행과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여행은 인생과 마찬가지다.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이런 경우 최선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내 성격상 아닌 척하며 웃고 넘길 수 없다 보니 그 어색한 상황을 외면하는 게 내겐 최선이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 마추픽추 여정이 끝났다.
악전고투 끝에 해발 5천m 무지개산 등정
해발 5천 m 도전에 나섰다. 비니쿤카는 해발 5천40m다. 이곳은 무지개색 산으로 유명하다. 토양 성분이 산화하면서 갖가지 색깔을 내 산이 얼핏 무지개떡처럼 보인다. 비니쿤카에 상원, 민경, 택기와 올랐다. 상원과 택기는 한인민박 숙소꼼마에서 함께 묵었다. 민경은 아르마스 광장에서 15분가량 떨어진 외곽에 숙소를 정했다. 새벽 4시 30분 여행사 앞에서 남자 3명이 만나 밴에 탔다. 쿠스코 시내를 한참 돈 뒤 마지막에 민경을 태웠다.
비니쿤카에 도착하자 말을 탈지 걸어 오를지 결정해야 했다. 걸어 오르기로 했다. 예상대로 4천 m 넘어서자 숨이 가쁘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고 신체능력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두통이 찾아왔고 속이 메스꺼웠다. 나아가지 않는 발을 이끌고 열 발자국 걷고 5초간 쉬고 다시 열 발자국 걷고 5초간 쉬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함께 오르던 민경은 고산병 증상이 전혀 없어 산양처럼 비니쿤카 산을 뛰어올랐다. 등산에 적합하게 다리 근육이 발달되어 있고 체력도 상당했다. 지친 기색 없이 단숨에 비니쿤카 무지개 산에 도착해 사진 촬영을 위해 줄을 섰다. 상원은 말을 타고 올라 무지개 산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가뿐 숨을 쉬며 혼자 죽을힘을 다해 올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산행은 처음이다. 산행에 나서면 늘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던 내가 발을 질질 끌며 오르는 꼴이 보기 흉했다. 고산병은 남녀노소와 체력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내가 재수 없게 고산병에 취약한 인간임을 확인했다.
무지개 산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위해 서 있는 대열을 지나쳐 해발 5천 m 넘는 비니쿤카 정상으로 향했다. 홀로 힘겨운 투쟁을 거듭했다. 등반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찾아왔다. 위를 보지 않기로 했다. 발아래만 보고 열 발자국 걷고 쉬기를 반복했다. 한참 애면글면하다 마침내 정상에 닿았다. 생애 처음으로 해발 5천 m 고지에 발을 디딘 것이다. 정상 너머로 보이는 설산이 눈앞으로 아릴 정도로 바짝 다가왔다. 해냈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머리가 찡하면서 쪼개듯 아팠다. 인증숏만 촬영하고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한참 내려가 무지개산 앞에 닿자 상원과 민경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둘을 찍어주고 싶어 그 뒤에 서 있다가 얼떨결에 나도 한 장 찍었다. 어쩌다 보니 새치기를 한 셈이다.
민경과 상원은 참 보기 좋다. 내가 상원이 아버지와 동갑이다 보니 상원을 아들이라고 부른다. 모난 곳 없고 선하디 선한 청년이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고 카메라 촬영기술도 뛰어나 여행 동행자로서는 최고의 파트너다. 민경도 상원과 동행을 이어가고 싶은 티가 역력하다. 상원이 리마를 거쳐 와라즈로 이동하려는 여정을 민경이 따라가기로 했다. 민경은 스스로 내성적이라고 하지만 밝은 기운을 밖으로 내뿜는 매력적인 인간이다. 귀여운 말투나 쑥스러워하며 짓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이다. 무엇보다 산에서 웬만한 남자보다 뛰어난 움직일 정도로 체력이 좋아 트레킹 상태로는 최고다. 해발 4천 m 이상 고봉에서는 확실히 나보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자랑했다.
민경, 상원과 어울려 놀다 보니 택기가 보이지 않았다. 트레킹 베테랑이라 벌써 올라왔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택기가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멘붕상태였다. 여행 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린다는 건 대단한 손실이다. 휴대폰은 갖가지 인증서를 담고 있다. 숙소나 교통편 예약도 휴대폰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택기는 올라온 곳을 오르내리며 휴대폰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뒤늦게 무지개 산이라도 보려고 올라오는 택기를 만났다.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무지개 산에 올라서도 휴대폰 분실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내려와서 밴에 타서도 휴대폰에만 신경을 썼다. 도울 방법이 없으니 들어주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다 나도 간이 가방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지개 산 앞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여권, 지갑, 휴대폰처럼 중요한 물건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터라 가방을 잃어버려도 별 문제없었다. 물수건과 선글라스 케이스 정도가 들어있었다. 다만 숙소 열쇠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숙소 꼼마의 1층 입구, 4층 거실, 도미토리룸, 락커 열쇠를 모두 잃어버렸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살칸타이 투어를 해야 해서 락커를 꼭 열어야 했다. 밤 9시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꼼마 사장님이 부재중이라 동생 분에게 열쇠 분실을 알렸다. 동생은 늦은 시각 열쇠 수리공을 불렀다. 자물쇠를 뜯고 락커를 열었다. 자물쇠는 새것으로 교체했다. 열쇠 4개에다 수리공 불러 자물쇠를 갈았으니 200 솔 이상 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동생분이 "마스터키가 없는 것은 저희 불찰이니 25 솔만 주세요"라고 하더라. 늦은 밤 수리공을 불러준 것도 고마운데 고작 25솔이라니. 고맙다는 말을 거듭하며 30솔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