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 주
집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보통의 시계보다 20분이 앞서있다. 나는 아침마다 나를 속인다. 그래야 게으른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침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는데 처음엔 10분이었던 것이 아, 나를 너무 안일하게 봤다고 생각하면서 얼마 전에 10분을 늘렸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서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는 소리를 뚫고 저 멀리서 왜애앵- 하는 소리가 들렸다. 10시라는 전국적인 알람이 울리고 있는 1분 동안 아차차, 호국 영령들을 기억하며 묵념해야 하는 시간인 것을 깨닫고 침대에서 일어나 본다. 무탈한 오늘을 열게 해 주신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덕분에 이렇게 게으른 아침을 맞는군요. 감사는 잠시, 햇살의 온기는 계속.
그러나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일반적으로 보통의 직장인이 겪을 법한 일들을 겪는 것일 뿐인데,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하여서 녹록지 않은 길을 걷는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무난하게 고비들을 넘기면서 결국엔 어떤 지점들에 도달해 가며 살아내는 이들을 보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하게 되나 조금은 억울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생각해야 하는 지점일 때마다 했던 사색과 고민을 통해서 조금씩 성숙해졌노라 자위하고 지혜로운 결정들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도 자부했다.
그래도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해도 외롭고 여전히 관계는 어렵다. 대차게 척척 해낼 것 같이 생겨놓고 이것저것 다 챙길 것 같이 야무진 이미지라고 해도 난 내가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임을 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내가 시몬스 침대도 아닌데, 남들에겐 관대하고 나에겐 야박하다. 그렇게 열심히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해왔는데 문득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던 때 엄마에게 엄마처럼 살아서 불행하다고 고백하는,
능력주의 시대를 살고 그것에 맞게 평가받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로써 내 가치를 논했다. 불행하기 딱 좋은 생각이다. 행복한 직장인이 드문 이유이기도 하겠다. 홀로 잘 서보고자 노력했던 서른세 살에 썼던 글의 일부에서 내가 이렇게 감사히 받은 것만큼 이 사회에 가치 있는 부품이 되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행복한 부품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없다.
나는 깊어져야 할 때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정도로 고난과 시련이라 인정할 만큼 나약하지는 않은 것을 안다. 내 태도와 대처는 대부분 조심스럽고 어떻게 하면 상대에 맞출 수 있을지 이 조직에 맞는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해 왔다. 오랜 기간 작은 가게의 사장으로서 일했던 것이 내게 많은 경험과 자부심을 안겨줬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담스러운 이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의외로 내가 단호하거나 직설적인 태도가 되었을 때 환영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느낀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어린이. 그런데 어떤가. 내가 그렇게 움츠러들고 조심스러워한다고 해도 나를 미워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었고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한들 나를 좋아하고 말고는 내 몫이 아니었다.
내가 달라져야 할 때다. 과거의 묶인 것들로부터 자유해져야 할 때. 평범을 거부했던 초년생을 지나 평범함의 소중함을 아는 사회인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범상치 않은 인간이 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능력주의 시대에서 당당하게 그런 건 다 헛되다며 홀로 내 길을 걷겠다는 대담함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없다. 여러 핍박과 가스라이팅, 사회적 알람이 울려대는 통에 괴로워할 일들은 앞으로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살아내면서 스스로의 기준에 썩 멋진 내가 되는 것.
답지가 뜯겨나간 문제집을 푸는 듯한 인생에는 애당초 주관식이었음을 깨닫는다. 전교 1등이 목표였던 적 없다. 전 과목에서 3개를 틀리고 전교 3등을 했을 때에도 나는 꽤 만족했다. 기분이 좋았던 엄마가 학원에 떡을 돌렸다. 난 그게 행복했다. 그날 자기 답도 맞다고 우긴 끝에 중복정답을 얻어내고서 비로소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교 1등을 한 남자애가 떠오른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에게서 지랄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지랄을 해서라도 내 목소리를 내는 것. 다만 부디 적재적소에 그럴 수 있는 인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