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두 번째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맛있게 밥을 먹고 빈둥거리다 불금이랄 것도 없이 10시 전에 잠든 나는 컴퓨터를 켠 새벽 4시 49분에 글을 쓰려고 앉았다. 뭐라도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냉장고를 열고선 우유가 좋을까, 아니다 얼마 전에 내 쏘울푸드라고 산 콩국에 우뭇가사리 조합을 마셔야겠다고 살짝 설렌 채 컵에 콩국을 담았다. 알룰로스까지 조금 뿌려주고는 한 입 마셨는데, 오 내 냉장고는 여름에 맞춰 더 낮은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고작 한 번 먹은 콩국은 ‘으앙, 나 변해버릴 거야!’ 하고는 팍 상했나 보다. 9천 원짜리 콩국을 한번 먹어본 사람이 된 나는 3번은 먹을 수 있었던 콩국을 배수구에 부으며 아까운 내 소울 푸드... 하면서 아쉬워하는 아침을 맞는다.
편두통이 잦아져서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는 며칠을 보냈다. 그 후엔 이틀간 기침을 시작하기에 전에 겪었던 후두염이 다시 시작된 걸까 싶어 링거라도 맞을 요량으로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경력이 오래된 의사는 내게 30여 년 만에 처음 비염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내가 비염이라뇨. 내 동생이 비염으로 너무 고생한 모습들을 봐 오면서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던 병이 내게도 있다니요. 증상이 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가지고는 있었을 수 있다며. 그러고 보니 아침이 개운하지 않고 목이 칼칼한 이유, 안구 쪽이 두드러지게 아파 편두통이라 치부했던 이유도 비염때문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나는 마치 큰 병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허망해진 눈으로 약은 괜찮으니 링거와 주사를 놔달라는 말을 하고 허허 웃는 의사를 뒤로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비염은 삶의 질의 문제이지, 살고 죽는 병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건강검진 이후, 젊음으로 막아져 왔던 내 건강에 황신호들이 켜지고 있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다. 스트레스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이 신체화되면서 몸으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알지만, ‘너 이제 건강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건강한 사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 땀을 흘릴 만한 운동, 충분한 수면...
어떠한 파도에 휩쓸리듯 살던 적이 생각난다. 오롯이 서서 버텨낼 재간이 없어 그 파도들을 흠씬 두들겨 맞기도 하고 발버둥을 쳐 봐도 그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보기도 하고. 용맹하게 싸워 이기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그렇게 떠내려 가보자하며 망망대해에 떠 있으면서 간신히 숨만 쉬는 듯 살던 때, 어느 날은 내 심연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장 어두운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닥이라 생각했던 때에도 지하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하루, 또 하루. 그런 때에 1%의 희망이 있다는 건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모든 걸 포기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의 마음은 삶의 끝에 정리해야 할 곳이 거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시 시작했던 일상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1%의 희망은 붙잡았던 것 같다. 내 발로 병원을 가고 치료의 과정도 겪으면서 나를 알고 나를 살리는 데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마음은 지옥인데 웃으며 일했고, 사실은 숨 쉬니까 살고 살다 보니 살아졌고 그러다 웃는 일도 생기고 행복한 날도 맞았다. 가족도 모르는 외로운 순간마다 혼자서 견뎌낸 바닷가, 써내려 갔던 일기, 내게 격려해 준 사람들과 내가 값없이 베푼 선한 행동, 그런 것들이 나를 살렸다.
내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면서 나는 이렇게 마이너스를 겪은 날도 있었노라 설명하지만 나는 대체로 크지 않은 폭의 굴곡들을 그려왔다고도 덧붙인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굴곡들을 겪으며 요동치는 인생을 살아냈을까 싶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잔잔바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바닥이라 생각했던 때, 내가 얼마나 더 높이 올라가려고 이러는 걸까 생각한 순간 지하가 있다는 것도 경험하고 폴짝 뛰어오를 때가 언제인지도 모른 채 상승곡선을 그렸다. 나는 그 바닥 이후의 바닥을 경험할 때에도 그보다는 얕은 마이너스 곡선을 그렸다. 그때보다 더 나쁜 시간은 없었다고.
내가 어두운 터널을 지난 시간을 겪었듯 비슷한 심연을 가진 사람과 친해졌다. 그 친구의 고백을 어느 다음 주 강연장에서 들을 예정이다. 나의 병을 고백한 건 내 주변에는 가족을 포함해 세 손가락 안에 드는데, 그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도 나와 같은 병을 겪는데 그는 드러내고 용기를 낸 반면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게 신기하고 멋져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심연이 퍽 호기심이 간 것은 단순히 나와 같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심연을 가진 덕분에 깊은 사람이 된 걸까 하고 매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내 고백을 얘기해 줘서 고마웠다는 그는 나에게 어쩌면 나를 만나려고 여기에 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찬사가 내게는 터널 끝에 비로소 내리쬐는 빛을 맞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는 사람에게 바닥보다 더 깊은 지하가 있노라고 경고할 수 없다.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비염을 진단받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진단이 있었다고 해서 내 삶이 처참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지극히 내 인생, 내 경험에서 비롯된 가치관들은 누구에게 영향력을 줄지언정 섣불리 조언할 수 없게 했다. 각자의 손톱 밑 가시가 제일 아프듯이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랬을거다.
눈이 부은 이유는 무엇일까. 약은 됐다는 말에 후후 그르세요 그럼 하고 웃던 의사의 말이 복선이었을까. 오늘 문을 연 병원을 찾기 위해 휴대폰을 켜고 마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