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제인 Jun 24. 2024

구천 보와 한 걸음

6월 세 번째

240623




러닝을 한다는 친구의 선언에 나는 걷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어플을 깔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며칠간  2.XXkm를 뛰고서 나에게 인증을 해왔다. 그러면 나는 곧 3km가 넘겠다, 대단해!라고 응원을 보낸다. 친구는 어제 3.05km를 뛰었다는 인증샷을 보내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운동이라 할 만한 걸 하지 않았다.



피트니스를 끊는 수많은 성인들은 헬스장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정말 성공한 셈이다. 퇴근 후에 신발을 갈아 신고 가볍게 걷다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도 운동화는 차에 실려있기만 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갤럭시워치는 충전만 언제나 100%였지 내 손목에 차지지 못했다. 일상에 치여 우선순위에 밀려 그렇게 미뤄지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내 자책도 쌓이는 걸 느낀다.



결혼한 지 10년이 된 친구가 8년 만에 어렵게 가진 아이의 돌잔치에 초대했다. 물폭탄처럼 쏟아지는 빗길을 뚫고 150km를 달린 끝에 도착한 돌잔치에서 솔로상이랍시고 위스키를 받았다. 이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거나 결혼을 할 예정이거나 얼마 전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졌거나, 친구들이 각자의 발달과업을 이뤄가는 동안 짓궂은 MC가 건넨 마이크에 나는 솔로가 된 지 1년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머리를 꽤 길렀다. 펌을 하고 풍성해진 내 머리를 보고 머리 많이 길었다는 소리를 듣는 요즘, 우스갯소리로 내가 이 머리를 짧게 자르면 그땐 비혼을 선언하는 거라 너스레를 떤다.

종일 서서 일하는 동안 10년 전에나 지금에나 하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10년 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10년은커녕 5년 후도 장담하지 못할 세상에서 나는 변화할 거리를 찾는다. 황금빛 미래는 꿈꾸지도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고 간절하지 않아서 얻은 절망일까. 안분지족을 하지 못하고 과분한 영광을 얻으려는 욕망 때문일까.



시끄러운 사회적 알람들이 울려대는 통에 머리가 댕댕 울릴 지경이면  종료버튼이라도 누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머리를 기르든 자르든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으며, 솔로기간이 1년이 되어서 고개를 푹 숙일 정도로 부끄러울 건 또 뭔가.  나를 걱정해서 한다는 것들에는 어째서 나를 일으켜 줄 만한 말들이 없는 걸까. 나를 사랑해서 한다는 것들에 어째서 나는 상처받고 주저앉게 됐던 걸까.



연신 기침을 해댄 일주일을 보내면서 살기 위해서라도 시작해야 할 운동, 늘어난 체중과 앞이 캄캄한 당장의 지원서, 친구들과 차이가 커져가는 결혼과 기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전세만료일… 어느  것 하나 갖춘 것 없어 보이고 전전긍긍할 게 뻔한 인생을 가장 괴롭히는 건 내가 아닐까. 나는 나로 내 인생을 사는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버거운 것을.





다만 매일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 그 정도만 하기로 하자. 멈춘 과거와 더디오는 미래에 큰 실망이나 낙담은 오히려 미루고, 현재로서 충만한 지금을 살려고 하자. 조바심 나고 비교하게 되어서 나를 쭈구리로 만들거나, 괜히 척하면서 여유 부려서 부풀어지는 나를 만들지 말자.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대로의 너를 인정해 버리자.


오늘 걸은 구천 보의 걸음이 만 보가 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돌이 된 아기가 첫걸음을 뗀 것처럼 설레고 기뻐하자. 태교 하듯 젖먹이 대하듯 나를 돌보고 키우지 뭐.

이전 03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