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마지막 주
무섭도록 바쁜 2주, 2년 동안 일했던 매장에서 떠나 신규매장에서 영혼을 갈아내며 일을 하고 주말에는 본가에 다녀왔다. 떠나온 곳에 인사를 하고 환대를 받으며 안녕했는데, 사실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보다는 얼마나 사랑받았는가를 느낀 시간이었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최선을 다한 곳에서 나는 내가 잘 사라지기를 소망했다. 내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오는 일에 잘 닦여져 있기를, 잘 적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 나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떠들기를 원치 않았다. 잠시동안은 감상에 젖어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려고 했지만 현실은 그 시간을 허락지 않았다. 내가 떠난 곳에서도 그랬을 테지만, 각자의 현실에 적응하느라 또 순탄치 않은 일들을 겪어내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하는 며칠 동안 여유는 사라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에는 사실 엄마의 품이 그리워서라기보다는 어디엔가 마음 뉘일 곳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말을 했다. 피곤을 무릅쓰고 KTX를 타고서 본가에 내려갔는데 픽업을 온 엄마의 차 안, 라디오에서 재생되는 케니지의 색소폰 소리가 하루를 위로하는 듯했다. 엄마와 나 사이엔 별 말이 없었고 그저 한 주를 그렇게 위로했다.
악몽을 꿨던 날, 가위눌린 듯 몸이 천근만근이었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과한 스트레스와 두려움, 불안과 싸웠다는 것을 느꼈다. 멘털이 나갔던 날, 제어하지 못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양적으로 너무 많은데 그런데도 나를 위로하는 건 차차 나아질 거라는 희망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신이 아니고서야 내가 계획한다 한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다. 보이지 않는 미래와 멈춰있는 과거에 연연하기를 그만 두기로. 그저 현재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무더운 이 여름, 인생 최대로 기른 머리를 어제 단발로 자른 것처럼 나는 가벼워지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어젯밤은 얼마나 숙면했던지.
함께 일하던 장애인직원의 눈에 비친 나는 완벽한 사람이었을까. "완벽한 사람이니까 남자친구도 없잖아요."라는 말에 폐부를 찔린 것 같은 충격에, 그 말을 한참 곱씹고 있는 중이다. 욕하고 싶은 의도로 내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부족한 인간이라고 내뱉은 말에 그녀의 대답이 오히려 내가 완벽한 인간이라니. 그녀에게 일에서의 완벽을 강요한 적도 없고 완벽한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서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부연된 말들로 비추어보면 그녀의 눈에는 내가 일에서 최선을 다 하는 모습들, 잘하고 싶어 하는 욕망들, 어떠한 사람을 볼 때 기준이 높아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정말로 부족한 게 많은 당신은 부족한 게 많지만 서로 기대고 있는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는데 나에겐 없다는 것. 나는 이 에피소드를 주변 곳곳에 늘어놓으며 나 이런 얘기 들었다! 하고 웃었다.
2년간 함께 일한 동료로서 그녀에게 들은 말이 내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히 곱씹을 만한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준이 높은 내 눈에 비치는 남자들은 시시하고 그래서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은 나의 연약한 부분과 관련이 깊다. 예전 같으면 주변에 이 얘기들을 하면서도 어쩌면 내 치부, 내 단점을 드러내게 되는 거 아닌가 고민하고 그것을 덮기 위해 에너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드러내도 나는 괜찮아! 하며 웃어버리고 마는 나로 변모했다.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도 괜찮은가에 대해 염려한다. 리더의 자리에서 엄격함과 흔들리지 않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혹여 내 권위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말과 글로는, 상처받은 환부를 의사 앞에서라도 드러내야 치료가 시작된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가 되어야 마음의 상처는 괜찮게 아물어진 거라고 표현해 왔다. 그래서 아파도 계속 용기를 내고 용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숨기고 싶은 부분들이야 누구에게나 있다. 그걸 고백하는 건 누구나 쉽지가 않을 것이다. 드러냄으로써 괜찮게 반응하거나 수용적인 태도의 상대를 만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면 그게 좀 더 쉬워지겠지마는 그렇다고 초면에 내 가정사가 어떻고 어렸을 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든지의 이야기를 하는 건 과하다. 어떤 시기부터는 그런 고백을 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매 순간 어떤 사람을 만나는 순간마다 진심이었던 것도 맞다. 그렇지만 솔직하지 못하고 내 얘기를 수용해 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재고 따진 것도 맞다.
오히려 누군가가 내게 그런 연약한 부분을 고백할 때에 내가 받고 싶은 반응들을 내가 해주는 사람이 되었었다. 정말 감추고 싶었지만 말해야만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당신의 입장에서 그럴 수 있겠다, 수용해 주었을 때 상대방은 뜻밖에 감동을 받고 감사를 표해주었다. 지체 장애를 가진 선생님이 몸이 불편해서 유니폼을 입기 어렵다는 고백을 어렵게 했을 때, 입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을 뿐인데 뜻밖에 너무 고마워해주셨다. 단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한 것뿐일 텐데 말이다.
내 입장에서도 누구에게 고백할 때에 조마조마하겠지. 나도 그런 긍정적인 경험들을 많이 하고 싶다. 상처였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서 고백할 수 있는, 구석구석에 박힌 슬픔들로부터 자유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