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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Dec 14. 2024

그가 청바지를 입을 때

When He Wore Jeans

그 남자


저 멀리,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네가 보인다.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모습.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오후, 바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너는 단번에 눈에 띄었다.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까만 머리카락,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네가 이 도시에 비춰지는 유일한 빛일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아니, 기억하고 싶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이었다.


달려간다.
환한 미소로 네게 화답하며.
너에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 한쪽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너를 마주할 때면 늘 그렇다.


매일 아침, 단정한 셔츠와 다림질된 정장을 입는다. 완벽해 보이는 옷차림 뒤에 스스로를 감추고 하루를 시작한다. 차갑고 완벽한 모습, 깔끔하게 정돈된 말투.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규칙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나를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본다.


어느 날, 네가 말했다.
“청바지 입은 모습도 궁금한데.”
그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조금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는 네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너는 내가 넥타이를 푸는 순간을 좋아했다. 늘 그렇게 말했지. “이런 모습이 훨씬 너다워보여.” 넥타이를 풀 때마다 닿는 너의 시선에 목 언저리가 조금 더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는 그 순간의 나를 오래 바라보았고, 나는 네 시선을 따라가다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어젯밤, 지친 몸을 이끌고 너에게 갔다.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이 이어진 일상, 어깨 가득 내려앉은 책임감의 무게는 하루 종일 나를 두통으로 몰아넣었다. 문을 열자마자 너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피곤한 얼굴로 서 있는 나에게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나를 안았다. 작은 체구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하루의 무게를 모두 덮어주듯이.


그 순간 생각했다.
이곳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여자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그가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는 단정한 셔츠에 자켓 차림이다. 걸음걸이에서 어딘가 깊은 무게가 느껴졌다. 늘 그래왔다. 그는 스스로를 단단히 감싸는 사람이었다.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 하루가 얼마나 긴지. 그가 얼마나 많은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지. 사람들은 그를 강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강함이 외로움과 피로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안다.


그가 점점 내게로 다가온다. 피곤함이 스쳐 지나간 얼굴. 그러나 나를 발견한 뒤 그의 눈빛이 서서히 풀리는 순간을 본다. 그를 보며 웃는다. 작은 미소가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어젯밤에도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게 기대는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는 나에게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손끝에 남은 떨림, 피곤한 어깨 너머로 전해지는 안도감 같은 것들이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그가 나에게 만큼은 가장 솔직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 날, 늘 그렇듯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목 끝까지 채워진 셔츠와 숨 막히던 넥타이 대신, 가벼운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그.


그는 어색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화답하듯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렸다. 달려와 안기는 그였다. 이런 순간이 사무치게 좋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늘 나를 안아주기만 했던 그가, 나에게 힘껏 달려와 안기는 순간.


“잘 어울리네.” 내가 말했다.

그는 여전히 멋쩍게 웃었다.


망가진 모습, 무너진 모습, 연약한 모습, 그 누구보다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선물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을 내게만은 저항 없이 내보이는 사람.


그런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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