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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Jul 21. 2019

Specification of Travel

스페인 : 세비야

이번 여행은 유독 스페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먹고 자고 마시고 즐기는 게 스페인의 음식 문화라던데, 어느새 이런 패턴이 몸에 배었는지, 요즘의 일상은 상당히 단조롭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나가서 거리를 활보하고 3시간 정도가 지나면 자연스레 숙소로 들어온다. 그리곤 침대에 눕는다. 그 상태로 한참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지기 전에 다시 나간다. 나가서 딱히 하는 건 없다. 그냥 걷는다. 그러다가 괜찮은 곳을 발견하면 앉아서 책을 읽는다. 책이 없다면 그냥 가만히 공상에 빠진다. ‘책 챙겨 올걸...’이라는 짤막한 탄식과 함께.


오후의 외출 대부분은 하루 동안 채워야 하는 활동량이거나 여행이라는 이름하에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 이루어진다. 이런 일상의 반복은 지금 지내는 도시를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 되었다.


이상하게 이번의 여행은 재미라던가, 설렘이라던가 하는 감정들보다는 차분함과, 어쩌면 우울에 더 가까운 감정들이 더 많다. 하지만 썩 나쁘진 않다. 오히려 이런 극도의 차분함은 모든 것들을 아주 섬세하게 느끼게 한다. "과연 나는 아무런 사건도 없는 여행의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 여백이 많은 시간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확신’ 비슷한 것을 찾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 세비야




또다시 떠남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왜 여행은 늘 떠나야 할까. 왜 자극적이고 새로워야 할까. 잦은 도시 이동이 꼭 여행의 필수품이어야 할까. 그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여행의 스펙’을 좌우하는 걸까.


웅웅 거리는 선풍기 소음과 거리의 음악소리가 한대 섞여 정신이 몽롱했다. 큰 창문 너머로 흥에 취한 'Despasito' 노래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내 침대 위엔, 마치 슬로 모션을 걸어놓은 듯,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 리듬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지나가는 밤이 아쉬워,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을 붙잡으며 홀로 맥주를 마셨다.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바게트에 하몽을 올려 한 입 베어 물었다. 소금기로 가득한 입안으로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건조와 숙성, 그 지겨운 과정을 반복한 이 짜디짠 하몽은 시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던데, 괜히 그게 진짜인지 시험해보고 싶어 졌다. 시간이 지나도 지금처럼 여전히 자극적일까? 하는 물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령 내가 여행을 태하는 태도, 사람을 만나는 방법, 누군가와의 불타던 사랑, 무언가에 대한 열정, 삶의 방향. 돌이켜보면 모든 것들은 서서히 변했다. 숙성의 시간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확신은 무언가 숨기고 싶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맥주가 다 떨어졌다. 디저트로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쓰고, 짜고, 달고. 단조로운 일상에 오늘은 쓴 맛이 더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마무리는 달달하길 바라는 괜한 욕심.



스페인 바르셀로나 야경 명소 벙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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