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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Dec 04. 2019

낭만적 여행의 끝

이 여행의 끝은 어떨까?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과
아팠던 모든 순간들을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아팠지만 괜찮았다.
여행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었으니까.


결핍에 의한 감정싸움. 우린 다시 같은 이유도 싸우고 같은 이유로 서로를 미워할 것이다.


우리는 시작을 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애정이라는 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의 내리거나 답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미완의 공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렇게 매번 헤매는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스스로의 아픈 부위를 알고 있어서 절대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애를 써가며 자신의 결핍을 숨기지만, 결국 감정의 덩어리가 되어 밖으로 다시 튀어나오고만다.


끝이 보이는 연애.

끝을 생각하는 연애.


그녀는 쏟아내듯 말했다. “내가 어떠한 대상에게 정을 쏟았다 한들, 그 ‘정’의 종류에 대해 해석하기는 상대의 몫인 거지. 내가 친구라고 느낀다한들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린 우정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연인이라 생각한들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린 애정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의 감정이란 게 참으로 신기하지 뭐야. 하지만 무작정 던져놓고 책임을 묻는 감정이란 건, 이기적인 거잖아. 그로 인해 우린 때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오해를 하기도 해. 매번 겪어도 잘 모르겠어.”


아프다가도 행복하고, 그 세상 속에서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그리고 우리가 되곤 했다. 그래서 상호 간의 소통과 마음의 주고받음이 그만큼 중요한 걸 지도 모르겠다. 아주 잠깐 이런 상상을 해봤다. 사랑에 인생을 걸어볼까 하는 낭만적인 상상. 하지만 누군가를 운명이라 믿기에 우린 이미 너무 어른이었고, 재고 따져야 하는 현실이 눈 앞에 놓여있었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숨기기 바빴다.


마냥 조심스러울 수도, 마냥 솔직할 수도 없으니,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많이 아파본 탓이겠지.


붙잡는다 하여 붙잡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으며 그렇게 이별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때때로 아팠다. 누군가 날 아프게 한건 아니었지만, 아팠다. 영혼의 아픔이었다. 출처도 원인도 모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픔에 위로와 사랑을 받고 싶었다. 마음을 얻을 수 있은 수단이 그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뿐이라 여겼다. 누군가의 연민이 애정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상처를 무기로 삼는 것. 제일 싫어하던 짓을 스스로가 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그녀는 누군가의 애정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아파야 했다.


그래서 연민이 아닌 '사랑'을 받을 때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픔'을 보고 온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나’를 보고 온 대상에 대한 어색함.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대상에 대한 낯섦은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보여주어야 하는지 주저하게 만들었다. '진짜 나를 보여줘도 괜찮은 걸까?'


지금껏 형체가 없는 사랑에 매달리며 애태우던 방식에 익숙해진 탓에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공허해 했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진짜' 나는 뭐야?'

'아프도 괜찮은 온전한 나.'


아파도 된다. 아픈 게 당연했다. 마음이 커질수록 이별의 아픔이 커지는 것 또한 당연했다.

중요한 건 아프고 난 후, 어떻게 회복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삶이라는 것은 만남과 헤어짐의 무한궤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의 아픔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고, 넘치는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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