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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Oct 07. 2023

"의외로 아들이 영어를 잘해!"

아들반 수업을 참관한 그가 내게 말했다.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어쩌다 아들 수업참관


2019년 즈음의 일이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그가 시간을 내서 자신의 경력을 위해, 학생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고자, 교육학 과목을 몇 개 들었다. 그중 한 수업에 다른 이들의 수업을 참관한 뒤 평가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다. 본인 수업 강의하느라 바빴던 그는 봄학기 강의가 마무리되는 4월 말 즈음에야 그 과제를 떠올렸다. 어느 수업을 참관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에게 나는 최상의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진작 내게 말하지!


대학에서 꽤 오랫동안 강의를 했던 사람이라 주변에 수업참관 부탁할 사람도 많고, 그가 맡은 수업 중 주제에 따라 외부인 초청강의가 많은 수업도 있는데, 당최 왜 고민을 하는지... 코로나 이전이라 외부인 초청강의는 강사 소개하고 강의실에 머물렀는데, 그 수업에 대해 평가서를 쓰면 될 걸 왜 고민하는지 의아했다. 그도 나의 명쾌한 해결책이 마음에 들었지만, 학기말을 향해 흐르던 시간이 문제였다. 참관할 수 있는 수업이 거의 없었다. 때마침 있는 그가 맡은 수업의 외부강사 수업에 대한 평가서를 작성했지만, 하나를 더 제출해야 해서 또 다른 참관할 수업을 찾는 게 관건이었다.


이래서 과제는 미리미리 해야 한다지만,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과제는 막판에 해치워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도 나도 세상 평범한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고민만 하는 그에게 내가 두 번째 평가서에 대한 묘안을 제시했다. 아들의 담임선생님! 초등학교는 6월 초에야 방학을 하니, 5월 수업참관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반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2019년 5월의 어느 날, 그는 사전에 아들의 담임선생님에게 메일로 양해를 구해 아들의 수업을 참관했다. 



만세! 아들이 영어를 잘한다!


그의 아들 수업참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던 내게, 아들의 수업을 참관하고 돌아온 그가 '신기하게, 우리 아들이 영어를 잘하더라.'라고 말했다. 그가 참관한 수업은 아들의 영어 수업이었다. 수업시간에 아들이 대답을 곧잘 했고, 영어 단어도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반에서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시절 이중언어 아이라 언어발달이 평균보다 조금 느리다는 말을 종종 들었고, 핀란드어 읽고 쓰기를 학교에서 배웠던 터라, 그의 아들 수업참관 전까진 우리는 아들의 영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영어를 1학년때부터 배운다고 들었을 때 핀란드어의 추가적인 모음 몇 개를 제외하곤 같은 알파벳을 공유하는 영어를 동시에 배운다는 게 조금 염려스러웠다. 알파벳 하나하나를 다 발음하는 핀란드어와 얼렁뚱땅 지맘대로 발음하는 영어를 동시에 읽고 쓰도록 배운다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다행히 영어는 간단한 일상 회화와 단어를 배우는 수준에 그쳤다. 모국어인 핀란드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게 우선이라, 생판 모른다는 가정하에 배우기 시작하는 외국어인 영어는 매우 기초적인 것만 배우는 것이었다.


아들이 영어를 잘하다는 소식은 내겐 작은 선물 같았다. 아들 반은 1학년 초기에 핀란드어를 이미 읽을 줄 아는 아이들과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로 그룹을 나눠 그룹별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모두가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다. 아들이 후자의 그룹에 속해 안타까웠다. 신문을 보던 부모님 옆에서 단어들을 어떻게 읽는지를 묻다가 스스로 읽는 법을 터득한 그와 달리, 나는 어린 시절 받아쓰기 나머지 공부를 하던 아이라, 아들의 부진이 내 탓 같았다. 그런데 영어는 잘한다니 다행이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들의 영어실력을 도통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아들의 완벽주의적인 성향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들은 조심스러운 아기였다. 머랄까? 본인이 확신하기 전에는 무언가를 잘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걷기를 예를 들면 무작정 걸으려고 애쓰느라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보여준 딸과 달리 아들은 걸음마 보조기를 한 손으로 잡고 밀어서 곧 걸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우리가 처음으로 목도한 아들의 걸음마 시도였다. 아들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기 전까진 우리에게 애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아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걸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자랐지만, 아들은 우리에게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핀란드어와 한국어만큼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만큼 하는 것도 아니니 스스로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때를 기다렸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수업시간은 예외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영어수업을 참관한 그가 아들이 의외로 영어를 잘한다고 놀란 게 아닐까? 문득 아들의 영어사용의 출발점이 언제였을까 궁금해졌다. 조용하게 훌쩍훌쩍 자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친 아들의 성장이 얼마나 될까? 왠지 모르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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