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제주에 왔다. 오랜만이라는 건 두 달 만이다. 내 집 앞마당 드나들 듯 매주 제주에 오던 때가 있었다. 그때만큼 자주 다니진 않아도 계절이 바뀔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마음이 추울 때 여전히 제주를 찾는다. 그리고 정신이 나약해질 때면 한라산에 간다. 지금이 그때다. 한라산 등반을 위해 제주에 왔다. 평소 등산을 즐기지도 않는데 가끔 한 번씩 무모하게 오직 정신력으로 한라산을 등반한다.
입구에 도착하자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연이어 들어오는 관광버스에는 ‘서울 OO고등학교’라고 쓴 종이가 붙어있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왔다. 하필 오늘, 이 시간에 한라산에서 10대 아이들을 단체로 만나다니.
복잡한 마음에 조용히 등반하고 싶었는데 떠드는 아이들 틈에서 한라산을 오를 생각 하니 두 배는 힘든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최대한 거리를 두고 따로 가기로 했다.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굳이 내가 마음먹지 않아도 10대 아이들과 내 체력은 너무 달라서 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눈에서 고등학생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참을 평화롭게 오르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구름 위에 올라있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움직이는 구름이 나무에 걸터앉은 듯한 그림 같은 풍경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잔잔한 감동도 잠시,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앞서갔던 고등학생들이 먼저 도착해서 블루투스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남학생이 장기자랑처럼 혼자 지드래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후렴구가 되자 다 같이 떼창을 했다. 한라산에 수십 명의 지드래곤이 모였다. 패기로 뭉친 푸르른 청춘의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모로 보기 힘든 광경을 봤던 하루였다.
고등학생들이 한라산 정상에서 간식을 먹는 틈을 타 먼저 하산하기 시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부지런히 가야 했기에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 조용히 하산하던 중 금세 나를 따라잡은 고등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날다람쥐 같은 녀석들이 얼마나 많던지 여전히 팔팔한 그들을 보니 나만 지친 것 같아 더 힘이 빠졌다. 두 팔을 늘어뜨리고 거의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자세로 내려가는 나를 본 한 남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잡아드릴까요?”
“아냐, 됐어, 괜찮아.”
조용히 거절했는데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야. 내가 노인도 아니고 뭘 잡아준다는 거야.’ 이럴 때 보면 나도 나이 들어가는 것에 예민하다.
남학생은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무슨 정신으로 걷는지도 모르고 앞사람 발만 보고 따라갔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남학생이 다시 나타나 내게 물병을 건넸다.
“이거 마시면서 오세요.”
어릴 때 어른들이 말끝마다 ‘요즘 애들은’이라고 하는 말이 듣기 싫었던 때가 있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나도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을 쉽게 갖다 붙이며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다. 그런 요즘 애들이 힘들어 보이는 내게 먼저 다가와 잡아주겠다고 하고, 물을 챙겨 건넨 것이다. 덥석 받기가 부끄러워 조금 망설였다.
“고마워. 잘 마실게.”
물병을 받아 드는데 발등에 단풍잎이 떨어졌다. 한 손에는 물병, 한 손에는 단풍잎을 들고 부지런히 내려왔다. 두 손 가득 행복이 넘쳐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고등학생들의 관광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잘 말린 단풍잎을 볼 때마다 물병을 건넨 남학생이 떠오른다. 요즘 애들, 참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