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의 순간
자연스러움과 부러움, 그리고 계획에 없던 설렘으로 빛나던 그 6월의 어느 날, 함께 정문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민이 말했다.
-너를 더 알고 싶어.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짐작해 볼 수 있을 만큼이라도 더 알고 싶어.
진짜인 구절로만 이루어진 문장들이었고, 가짜인 구석이 없는 표정이었다. 미아는 자신이 재연을 처음 마주 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이번엔 쉬웠다.
1학기가 끝나고 한여름이 제대로 시작될 무렵,
재연이 미아와 사강 사이에서 뜬금없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위기를 마주쳤을 무렵,
사강이 재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려줬을 무렵,
미아가 재연에게 잠시 거리를 두자는 말을 했을 무렵,
미아와 민은 이미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많이 친한 친구 거나,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학교 안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고, 같이 과제를 했다. 그렇게 비어있는 몇 시간을 같이 채우기 시작했다.
주로 낮 열두 시부터였다.
그들은 학교를 걸어 나왔다.
*
해가 높이 떠있는 오후, 서점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안에서 나란히 붙어 서서 신간 도서를 구경하는 그들을 보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보통의 젊은 연인이군’이라며, 서점 안에 흐르는 가사 없는 이 음악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보려던 책을 찾으러, 아니면 식당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서점을 나와 필름현상소에 들러 미아의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맡겼고,
학교와 거의 붙어있는 어느 아파트 단지 앞의 공원을 향해 걸었고,
거기에서 한 주에 한 번씩 열리는 작은 시장을 구경했고,
그러다 다시 골목길로 걸어 들어가 작은 카페에 한 곳을 골라 들어갔고,
몇 시간 뒤에 다시 카페를 나왔다.
그들은 다시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몇 시간을 같이 채우고 나서 학교의 강의실로 다시 돌아가고 난 후에도, 그들은 다시 함께 학교를 걸어 나왔다. 미아는 몇 분마다 한 번씩 보던 조용한 휴대폰을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고, 대신 이 도시의 저녁과, 저녁노을이 비추고 있는 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서점이, 필름현상소가, 공원이, 작은 시장이, 카페가, 학교가, 이 도시의 저녁이, 일상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 도시 여기저기를 같이 돌아다녔다.
여섯 시 정각이 되기 몇 분 전, 그들은 학교를 나와 민이 자주 가는 이 동네의 큰 마트에 갔고,
그 안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정사각형 두부 한 팩을 사서 나왔고,
이제야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밝은 저녁, 대학생들로 가득한 학교 주변 골목을 걷는 사람들은 나란히 걷는 그들을 보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보통의 젊은 연인이군’이라며, 따뜻해서 피부에서 더 오래 머물지만 동시에 산뜻하기도 한 이 초여름 공기와 비슷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른한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명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아니면 휴대폰을 켜서 무엇이든 틀어놓고, 아니면 아무것도 틀지 않고 조용한 상태 그대로, 그날의 습기가 배어버린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할 것이다.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는 얼굴과 몸과 그 모든 것에 눅눅한 여름이 달라붙기 시작한 계절이기에, 그걸 먼저 털어내거나 씻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와 창문들을 활짝 열러 집안을 돌아다니며 시계를 보면 일곱 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는 익숙하고도 가벼운 안도감이 섞인 한 마디로 이 시퀀스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오, 아직 일곱 시구나.
그리고, 각자 다른 뭔가를 시작할 것이다.
또다른 시퀀스의 시작.
그 시간에 미아와 민도 집이었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난 평일의 어느 날, 정확하게는 어느 과목의 시험 하나가 끝난 그날, 함께 미아의 집으로 갔다. 민은 낯선 미아의 베란다에서 양파 두 개를 가져와 다듬기 시작했다. 미아는 쌀을 조금 씻어 밥솥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민이 자신의 작은 부엌에서 익숙하게 요리를 하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몇 분 후, 그들은 작은 식탁에 앉아 아직 그리 어두워지지 않은 여름 저녁의 자연스러운 빛이 여전히 바깥의 도시에 남아있는 걸 바라보며, 바로 앞에 앉은 서로와 이야기를 하며, 그들이 만든 밥과 된장찌개로 저녁식사를 했다. 느리게, 느리게 먹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한 그 몇 분 후에도 계속, 바로 앞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느리게, 느리게 했다.
이제는 정말 해가 지고 어두워진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든 그들에겐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 속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작은 집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에서의 다정함이라는 게 그때의 그들에겐 그 순간의 전부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 순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전부였고, 그 집은 이 도시 안에 있었다. 그들도, 이 도시 안에 있었다.
미아는 순간 이 집이, 원래 자신이 오기 전부터 이 도시를 구성하고 있던 이 집이, 정말 자신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이 도시 안에 반쯤이라도 나의 공간이라는 게 있다는 게, 그리고 자신이 정말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디든 자신이 있는 곳이라면,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러다 그는, 이 공간 안에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생각했다. 한쪽은 바라던 대로 변해가는데 한쪽은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변해갔다. 그 예상치 못한 모양이란 복잡하게 엉켜있으면서도 희미한,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제자리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의 일상은 더 행복해졌다. 하지만 미아의 일상은 갑자기 더 복잡해졌다. 민과의 시간은 진짜 같고 더 현실 같았으며 그게 좋았지만, 이 사실이 미아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관계라는 게 이렇게 진심으로 채워질 수 있는 건지, 극적인 장면들 없이 구성되어도 되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민이 자신을 정말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의심했으며, 자신이 민을 정말 좋아하는지는 아예 알 수 없었다. 미아는 재연과의 엉망으로 만들어진 연극 같은 시간에 매여있었다. 그들의 연기와 이 도시의 연출은 괜찮았으나 이야기가 문제였다. 거리를 두는 몇 주 동안에도 이 문제 투성이 연극에 계속 매여있었다. 그래서 미아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원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려낼 여유가 없었다. 그가 침착하게 생각을 시도할 때마다 이야기와 사람, 그리고 도시가, 그를 계속 방해했다. 머릿속을 뿌옇게 흩트려놓았다.
미아는 민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가짜 같았다.
재연이 된 느낌이었다. 그 최악의 엉터리 멜로드라마 안으로 더 들어온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도대체 누가 쓰기 시작한 거야?
그가 혼자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거지?
습기 가득한 그 마음속에서 소리 질렀다. 목소리가 안에서 웅웅 울렸다.
펜을 계속 잊어버린 채로 있어야 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