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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Oct 01. 2024

열두 개의 순간들, 일곱

흡입의 순간

7. 흡입의 순간



미아는 눈앞의 소화제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 모를 소화불량이 느껴지기 시작한 지 몇 시간쯤 된 시점이었다. 그는 그걸 일찍 인지하지 못한 채 뜨거운 커피 세 잔을 마셔버린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위장이 점점 더 답답해져 앉아있기도 싫었다. 그는 꼿꼿이 서서 식탁 위의 소화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둑해지는 밤의 기운에 이끌리듯 베란다로 나갔다.


여름 안 도시 속의 건물들이 빛났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도 켜져 있었다. 시내버스 몇 대가 눈앞에 바로 보이는 두 개의 버스 정류장을 몇 분 만에 쉴 새 없이 거쳐갔다. 프랜차이즈 카페 몇 개와 대형 서점, 드럭스토어, 음식점 같은 자잘하면서 번쩍이는 상점들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고, 흡입하고 있었다.

미아는 이제 이 도시가 자신과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이 도시 둘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도시가 자신을, 자신이 이 도시를 천천히 흡수하다가 이제는 빠른 속도로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흡입하는 두 주연.

적당히 높은 건물과 밤에 곳곳에 켜지는 샴페인색 불빛, 파란색 버스가 아침부터 밤까지 많이도 지나가는 넓은 도로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허전할 것 같았다. 특히 저녁에, 수업이 끝나고, 수업과 수업 사이에, 밤에.

그러니까 그는 예전의 이방인 같은 느낌은 이제 받지 않았다. 이 도시를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지도, 자신이 아직도 이곳에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이곳이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진 않아도 이 도시 여기저기에 지금껏 남겨놓은 연한 기억의 흔적들이 이제야 하나둘 선명하게 살아나 자신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학교, 학교 안 카페, 학교 안 도서관, 바로 앞의 벤치, 이 카페와 저 카페, 이 서점, 저 빌딩의 화장실, 그 편의점, 시장, 마트, 공원, 필름현상소, 넓은 차도, 적당히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인도. 대학생들의 동네와 또 다른 사람들의 동네. 자신이 이 학교를 정말 다니고 있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이 도시에 살고 있고, 이 도시 곳곳을 잘 알고 있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이젠 낯선 경험이 아닌, 보통의 일상처럼 여겨졌다. 바로 이런 게 일상의 느낌이었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후로 일상이 된 모든 것들이 일상이었다. 그는 이곳, 이 도시인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선명하게 살아난 모든 것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후로 일상이 된 그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곧 죽어버리고 일상의 바깥으로 스르륵 빠져나갈 거라는 걸 알았다. 연기하는 도시인.


유감이지만, 바로 그게 네 모습이란다.


미아는 다시 식탁 앞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소화제 한 알을 입에 집어넣고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상하게 조화로운 단맛과 쓴맛이 합쳐진 느끼한 끝맛이 딱딱한 소화제가 목을 넘어가는 순간 느껴졌다. 온몸이 무거웠다. 온 집안이 후텁지근했다. 넓은 창문으로는 더운 바람이 끊임없이 천천히 불어 들어왔다. 그는 차가운 두 손을 겹쳐서 자신의 끈적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아무 말도 하지 않든, 그게 다 너야. 어떻게 할래?


그는 두 손을 여전히 이마에 댄 채 화장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수도꼭지를 확 틀어 두 손을, 그리고 팔에도 있는 그 열기를 차가운 물로 식혔다. 시원했다. 그는 손에 물을 받아 얼굴의 열기도 식혔다. 물이 얼굴을 따라 턱 밑으로 흘러내려가면 또다시 뜨거워졌다. 미친 여름이구나, 그가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거울로 전혀 식혀지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눈 안의 흰 부분이 가는 실핏줄 때문에 붉었다. 지금의 이 웃기게 불편한 상황은 호르몬 때문에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세면대를 짚고 있던 두 손이 떨리는 걸 본 그는,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소화제 상자를 열어 입에 한 알을 더 넣었다.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어 2리터짜리 페트병을 꺼냈고, 뚜껑을 열어 차가운 물로 입 안의 소화제를 넘겼다. 그리고는 비어버린 상자의 한쪽을 뜯어 접어서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 납작해진 상자를 대충 한 번 반으로 접은 뒤 그는, 주저 없이 운동화를 신었다.

조용히 숨 막히는 7월의 밤 열 시였다.

그는 집을 빠져나왔다.


충분히 어두운 밤, 빌라 건물을 나온 미아는 아직 하루를 끝내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며, ‘그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노래든 갖다 붙이기만 해도 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 같았다. 미아는 계속 길을 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도시의 많은 사람이 그러듯 운동을 위한 산책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 그는, 이 시간에도 열려있는 약국을 찾는 중이었다.

이 동네에 약국은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동네지만 경계가 모호해서 그냥 이 동네라고 부르곤 하는 옆 동네들에도 많았다. 아마도 이 도시에 아픈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이제 곧 서서히 아파질 사람들을 위해 하나둘 약국이 생긴 거라고, 그리고 이 약국들은 이곳에 약국을 차린 사람들의 선견지명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진실된 경험 덕분에 생길 수 있던 거라고, 미아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각자의 약국 안에서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을 항상 기다리고 있는 약사들을 믿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폐의 용량에 비해 너무나 큰 무언가를 흡입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소화제 박스를, 아니면 아스피린을, 아니면 해열제를 손에 올려 놓아줄 사람들. 그 큰 무언가가 다름 아닌 이 도시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휩쓸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그 휩쓸림을 탓할 대상이 자신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이 모든 게 흔한 증상으로만 나타나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 같은 것 없이 오로지 그 흔한 증상만 가지고 이 시간에 걸어 들어올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


더 이상 어두워질 게 없던 밤, 이 도시 사람들로 평소보다 꽤 많이 채워진 것 치고는 생각보다 조용했던 밤을 걷던 미아는, 아직 환히 조명을 밝히고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그 사람들을 보며 정말 보통의 사람들, 이라고 생각하며 느리게, 느리게 그 앞을 지나쳤다. 그렇게 그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에 비해서는 꽤 조용한 밤이었다. 여러 색의 조명들, 대부분은 샴페인 빛 조명으로 밝게 반짝이면서도 잔잔했으며, 평화로웠다. 마치 소리를 살짝 작게 낮춰놓은 영화의 장면 같았다. 그는 방금 지난 카페를 비롯해서 또 다른 카페들,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음식점들, 여전히 바쁜 버스 정류장, 멀리 보이는 학교의 건물들, 그리고 연한 주황빛 가로등을 천천히 구경하며 이 사이사이에 아직 영업 중인 약국이 있는지 신경을 세웠다. 그리고,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에서 큰, 그리고 조명이 켜져 있는 약국을 봤다. 그리고 그 약국은 미아가 발길을 돌리는 중에 조명을 껐다.


조명을 끈 그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직장을 홀가분하게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직장과의 거리가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아늑한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제는 집의 조명을 켜고, 휴대폰과 지갑과 텀블러를 내려놓고,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음악 앱에서 자주 듣는 목록을 재생하고, 그날의 먼지와 습기가 묻은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빠르게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스치듯 보고는 화장실에서 나와 시계를 힐끗 보니 열 시 반 정도였다. 휴대폰에서는 계속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익숙하고도 가벼운 숨이 섞인 흥얼거림으로 이 시퀀스를 마무리 짓는다.

음음음.

그리고 피날레.

장면은 끝났지만 이 현실에서 그는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급기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내일은 그가 약국 문을 닫고 쉬는 날이다.


그 시간에, 미아는 그 불 꺼진 약국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그는, 편의점에서도 소화제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또, 방금 소화제 두 알을 삼켰으니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소화제 없이 있어도 괜찮다는, 아니 그래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려냈다. 갑자기 이 충동적이었던 외출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김이 샜다. 바로 이런 게 흡입의 증거인 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물이 계속 줄줄 흘러내렸다. 워터프루프 선크림 덕에 얇게 코팅된 것 같은 얼굴 표면으로, 빠르고도 곧게 흘러내렸다. 닦을 새도, 닦을 필요도 없었다. 눈물방울들이 볼을 타고 흘러 곧바로 건조한 땅에 뚝뚝 떨어지는 동안, 미아는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생각했다. 단순히 여름의 습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소화불량 때문이거나, 호르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콕 집어서 말하기엔 애매했다. 사람인지, 장소인지. 재연인지 민인지 자신인지, 이 도시인지. 그는 얼굴의 눈물자국을 손으로 가볍게 털었다. 두 눈이 순식간에 따가워졌다. 의미 없는 눈물과 의미 없어진 선크림 때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소화불량은 호르몬 때문일 것이었다.


정말로. 그는 방금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한 이틀 후에 생리 기간의 시작이라는 걸 생각했다. 이게 다 곧 사라질 증상들이라는 걸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몇 번은 한 익숙한 생각들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건조해진 상태로 이 동네를 돌아다녔음을 생각했다. 소화불량 때문에 치솟았던 온갖 짜증과 불안함이 조금은 사라져 있었다. 제발 좀 일단 진정을 하고, 증상의 이유, 그중에서도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를 인지하고 나면, 얕지만 쓸데없이 크게 찰랑이던 불안은 일단 사그라든다. 방금까지의 장면들이 조금은, 너무 극적이게 보인다. 이것도 언젠가부터 몇 번은 해야 했던 익숙한 생각들 중 하나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눅눅한 도시의 여름이 폐로 들어왔다. 그게 그를 진정시켰다. 습기 어린 그 끈적하고 더운 공기가 몸속에 천천히 내려와 앉았다. 그리고는 따뜻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어느새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일주일 전쯤 입구를 막아놓더니 오늘 막 다시 열린 이 공원의 구조가 살짝 바뀌어 있다. 벤치의 수도 늘어났고, 모든 게 더 깔끔해져 있다.

미아는 반듯한 새 벤치에 앉아 계속 이 도시를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잔잔한 불빛들을 구경했다.

심장이 간지러웠다. 바로 눈앞의 주황빛 가로등이 아주 잠깐 깜빡거렸다.


그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그래서 뭔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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