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음의 순간
몇 주 후, 재연의 집에서 미아는 재연에게 누군가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친구 같은 건 아니고, 많이 가까워졌어. 그 사람이랑 잘해보고 싶어.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행동한 그 원인의 중심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있으며, 자신의 이 잘못된 행동에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이 행동 그 자체 그것 하나일 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가짜여야 하는 건 이 상황인데 다른 게 가짜임을 생각하며 민에게 미안했고, 자신의 그 잘못된 행동 그 자체가 정말 행해지도록 내버려 둔 것을 생각하며 재연에게도 미안했다.
재연은 화를 냈다.
-내가 같은 상황으로 또 상처를 받게 하네. 너 이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알아?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지만, 재연의 이 말을 듣자마자 미아의 죄책감이 공중에서 산산이 찢어졌다. 정말, 가만 생각해 보니 괜찮은 증상이었다. 찢긴 게 죄책감이라는 게. 물론, 재연을 향해있던 죄책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한편 이 순간, 그러니까 이 말을 함과 동시에, 재연은 자신이 우려하던 상황이 끝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미아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느꼈다. 미아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고, 동시에 자신이 정말 상처받았다는 게 느껴졌다. 애정과 상처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시원하게 찢겨나갔다. 그는 이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일시적인 건지 지속될만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이 지금 이러는 이유가 정말 미아를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일상의 중심이 미아로 바뀌려 하는 것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을 별안간 마주해 버린 사람이 되어버린 그는, 최근 몇 주 동안, 아니 지금까지 자신이 중심에서 끌고 오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리저리 변주되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사강으로, 이제는 미아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자신은 이제 어디에 섰는지 모호했다. 주변인이 된 것 같긴 한데, 주변인이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라는 것인가. 그는 자신이 주변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계속해서 사랑받는 역할이 옵션에 없었다. 그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하며 미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에게 제대로 된 지문이나 대사를 줘.
아니면, 그런 작가가 된 걸까.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에 대한 겁도 없이 최악의 이야기를 만들어대는 실력 없는 작가, 아니면 최악의 이야기를 만들고도 왜인지 칭찬받는 실력 있는 작가. 그러다 그는, 이야기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멍청해 보였다.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그는 겉으로는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점점 이야기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음에 당황했고,
이렇게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계획에 없던 건데.
점점 자신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음에 당황했다. 시립미술관에 울려 퍼지던 피아노 소리가 머릿속에 둥둥 울렸다. 점점 빨라졌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는, 이 상황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것일 뿐, 진짜는 아닐 것이다.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진짜와 가짜 그 중간, 그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끌지 못하게 된 이야기라면, 현실적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랑이 중심이어야 한다면서. 그렇게 하면 돼. 이제부터 그런 사람이 되면 되잖아.
몇 개의 이야기들이 섞이기 시작했고, 모든 생각들이 왔다 갔다 했다. 그의 눈은 당황스러움과 비현실적인 감각 때문에 흔들렸다.
미아가 바로 앞에서 그 눈을 보고 있었다. 새로운 눈이었다. 재연이 눈을 몇 초간 감았다 뜨고 난 후로는 더 새로워진 눈이었다. 그에게서 본 적 없는, 새로운 느낌의 상처받은 눈이었다. 하지만 미아는 몇 분 전 죄책감이 산산이 찢어지고 있음을 느낀 후로, 이제는 자신의 상처를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눈을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이 이미 상처받고 있지만 이제는 여기에서 더 상처받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 때문에 그의 눈도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다 네가 만든 일이야.
미아가 말하자 재연이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나를 믿지 않는 네가 만들고 있는 일이겠지.
재연의 말투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느낌의 말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새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목소리 크기와 높이와 떨림 같은 것들만 평소와 달랐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그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그건 상당히 큰 부분이었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만났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나를 버린 사람이랑 왜 또 만나겠냐고.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물어볼래? 지금 전화해?
재연은 말하기를 멈추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속에서 혼자 조용히 엉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미아를 쳐다봤다. 미아도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속으로 말했다.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재연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그런 미아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단호함이 새어 나왔다. 바로 이게, 재연이 미아를 진짜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 이제야. 이제 와서! 그 빛은 창밖을 내다보면 바로 보일 저기 저 긴 횡단보도 바로 앞에 입구가 있는 작은 공원, 그 안에 있는 야외등 불빛들 중 하나 같았다. 주황빛.
그 빛을 발견한 재연은 문득, 휴대폰을 들고 있는 자신의 한쪽 손이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공중에 있는 걸 느꼈다. 어색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엉망이 되었음을 느꼈고, 여기에서 더 엉망이 되는 건 혼자 있을 때여야 한다는 걸 생각했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조용히 넣었다. 그러고는 괜히 앞에 있던 컵을 집어 들어 입에 가져다 대며 미아를 쳐다봤다.
미아가 말했다. -우린 서로를 아예 모르잖아. 알고 있었어?
재연이 컵 바닥에서 얕게 찰랑이는 커피를 입에 털어 넣는 사이, 미아는 신발을 신었다.
-전화 잘 해.
그러고는 현관문을 열어, 집을 나갔다.
주황빛이 희미해졌다. 집은 어두웠고, 비어 보였다.
재연은 컵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텅 빈 소리가 났다.
*
며칠 후, 재연은 미아에게 했던 그 모든 말들 대신 다른 말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똑같은 말을 할 것 같았다.
내가 같은 상황으로 상처를 받게 하네. 너 이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알아?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다시 사강과 연인이 되면 된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그러다 사강이 아무렇지 않게 안경을 돌려주던 그 장면을 떠올렸고, 사강이 이제 이 이야기에서 완전히 나가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심지어 이제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미아를 사랑할 의지만 남아 있다는 걸 생각했다. 그는 미아에게 대신 이런 말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꼭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해. 네 말이 맞아. 이제 정말 안 그럴 수 있어.
지금까지 이 관계가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 사실 정말 농담 같은 걸로 여겼는데, 이젠 아니었다. 갑자기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지난 순간들 중 어떤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미아가 정말 편의점에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나간 거라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내 표정을 보고 이런 식의 말을 했어야 되는 것 아니야? 그가 생각했다.
왜 그래?
거기 서서 뭐 해?
이런 말.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의미 없는 회상은 그만두자고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계속 생각났다.
그때 이미 나가버렸던 거야.
그리고 같은 시간, 미아는 재연에게 시끄럽다는 말 외에 할 말을 더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지금도 거짓말이구나. 하긴, 너는 그런 사람이긴 하지.
그 사람을 왜 끌어들여? 내가 화난 상대는 넌데.
이렇게 중간중간 대꾸라도 했어야 했다고, 후회가 멈춰지질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어느 한 구석에서는, 차라리 이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입을 열었다면, 저 대꾸들 말고도 이상한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모든 걸 망친 게 너라는 걸 계속 모를 작정이야?
이런 말들. 모든 걸 망친 게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 다행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민에게 가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심으로, 자신이 아직 재연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이제 자괴감으로 둘러싸인 채, 절대 민에게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재연에게는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다짐했다. 이 상태로 민에게 가거나 재연에게 진심을 말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구덩이의 바닥을 밟고 가만히 눌러앉아있는 꼴이 될 것이었다. 사실 진심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재연이 구덩이라는 건 확실했다. 미아도 이 이야기를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이 망가진 관계 그 자체 때문이었다.
그때 그냥 그대로 갔어야 했어.
그들이 애매하게 헤어지는 것으로 엉킨 실이 풀렸지만, 실타래가 엉킨 자국이 여전히 무대 위에, 스크린에, 종이에 남아있었다. 계속 눈에 밟혔고, 신경이 쓰였고, 치우고 싶었다. 지저분했다. 심지어 점점, 그 실타래가 제자리에서 불어나는 듯했다. 보풀이 점점, 엉망이 점점, 지지직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신경을 건드렸다.
어쨌든 이제 그들의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강은 재연에게 마음이 드디어 떴어, 라며 그를 떠난 걸로 그들의 관계가 끝이 났고, 미아와 재연이 헤어졌고, 그 이후에는 미아가 민에게 정말 미안해,라고 말하며 자신만 알고 있던 복잡함을 털어놓고는 민의 집에서 걸어 나온 것으로 끝이 났다. 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아를 떠났다.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알려는 의지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을 거라고, 미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이 재연이 되었음을 생각했다.
*
넷은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강한 빗줄기가 멈춘 후의 소강상태였다. 모두가 바란 일일지도 몰랐다. 순간으로 시작된 관계는 순간으로 끝났다. 미아에게는 드문, 재연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에게 각자 다른 모양의 외로움을 남겼다. 재연에게는 처음으로 마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무언가가 남겨진 듯 어색한 모양이었고, 미아에게는 원래 있던 자리에 딱 들어맞는 모양이었다.
공기가 탁했다. 언제든 먹구름이 다시 생겨날만한 공기였다. 구름이고 안개인 줄 알았는데 미세먼지인 공기였다. 그 상태로 하루하루가 흘렀다.
삶에서 지직지직, 소리가 났다.